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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소정 Dec 25. 2021

우리는 진짜로 여성을 혐오하는가(2)

| 혐오 감정의 허구성 |


사실 혐오 감정은 대부분 모호한 대상화가 일으킨 착각이자 허구이다. 즉, 문제의 본질을 회피하려는 일종의 방어기제다. 때문에 혐오의 대상마저 모호하다. 여성이란 단어에서 김치녀를 떠올리고 혐오 감정을 느끼는 남성이라도 자신의 어머니·누나·여동생·애인·아내·딸 등을 김치녀라 부르며 증오하지는 않는다. 문제의 핵심이 여성인가? 여성이 함께 경쟁하기 때문에, 여성이 혜택을 다 가져가서, 여성이 가사와 육아에 전념하지 않은 채 사회 경쟁에 뛰어들어서 이처럼 불안한 현실을 맞이하게 된 것인가? 사실 우리는 진짜 문제가 무엇인지 모르는 게 아니다. 다만 외면하거나 더 쉬운 길을 택할 뿐이다. 


누군가 김치녀라고 부르는 그 어떤 여성도 더 깊이 들여다보면 의미 있는 인생이며 누군가에게는 소중한 존재들이다. 혐오를 하는 사람들도 그 사실을 모르지는 않는다. 다만 ‘여성·장애인·소수자’ 등 주변인들이 막연히 규정하는 자신과 다른 대상들에게 모든 답답함을 뭉쳐서 ‘탓’을 돌리고 혐오 감정을 쏟아낼 뿐이다. 탓을 돌리면 합리화가 되고, 남들이 혐오하는 것을 함께 혐오하면 동조 심리로 죄책감도 옅어지고 감정의 찌꺼기도 어느 정도 해소되기 때문이다. 하지만 실제로 혐오하는 것은 문제의 본질을 외면하고픈 자신의 아픈 모습일 뿐이다. 


흔히 역사는 반복된다고 한다. 사회가 불안해질수록 사람들은 문제의 본질을 보기보다 가장 만만한 대상에게 분노와 혐오 감정을 배출하려 한다. 그것이 가장 안전하기 때문이다. 예나 지금이나 사람들은 파악되지 않는 것을 두려워한다. 통제할 수 없는 것처럼 불편하고 불안한 것도 없기 때문이다. 따라서 혐오와 차별로 자신이 더 우위임을 확인하며 안도감을 얻으려 한다. 그런 식으로 통제할 수 없는 것을 장악하거나 자신의 영역에서 떨구려 애를 쓴다.      

    

| 혐오 문화로 이득을 얻는 것은 누구? |


하지만 ‘탓’을 하여 얻는 일시적 평안은 문제의 본질에 눈감고 적절한 변화와 쇄신을 막아 결국 더 큰 것을 잃게 한다. 과거 조선은 사회·사상적 경직과 지배층의 무능과 부패로 인해 생긴 병자호란과 임진왜란의 충격을 여성에게 돌려 환향녀와 열녀를 만들었다. 그 때문에 근본적인 문제를 성찰하고 쇄신할 기회를 놓치고 말았다. 

더불어 문제의 본질을 감추고 기존 시스템 유지를 원하는 기득권들, 미디어의 성급함과 인기를 위해 예민한 곳을 과장하는 특성, 본질을 외면하고자 하는 묵은 관념의 관성에서 오는 반발, 그리고 대중의 무관심이 그러한 혐오 문화를 지속시키고 가열시킨다. 그렇게 역사는 대중의 관심을 다른 곳으로 돌리고자 마녀사냥을 반복해 왔다. 큰불을 작은 불로 막듯이 분노의 배출구를 열어 줌으로써 기존 시스템을 지키고 변화를 막을 수 있기 때문이다.    

  

하지만 분명한 것은, 우리는 남녀 간에 경쟁을 하고 있는 게 아니라는 사실이다. 우리가 남혐과 여혐으로 눈을 돌린 사이 보다 본질적인 것을 놓치고 있다. 성 대결을 한다고 해서 당면한 문제가 해결되지 않는다. 나아가 더 큰 문제는 상대에게 던지는 혐오가 돌고 돌아 결국은 자신에게 되돌아온다는 점이다. 내가 동조한 여성 혐오는 언젠가 내 가족과 지인 여성에게 되돌아온다. 때문에 휘둘림 없이 문제의 본질을 직시할 필요가 있다. 그렇게 해서 근본적인 문제가 해결돼야 분노와 혐오 감정은 건전한 동력으로 승화될 수 있다.           


| 우리는 진정으로 서로를 혐오하는가? |


2020년 10월, 울산의 한 고층 주상복합에서 대형 화재 사건이 발생했다. 강풍주의보까지 내려 불길은 순식간에 꼭대기까지 타고 올라간 일촉즉발의 상황이었다. 그런 위기 상황에서 남자들은 어린아이, 여성, 노인 등을 앞으로 보내고 자신들은 뒤로 물러섰다. 2020년 11월 인천의 한 공장에서도 급박한 폭발 사고가 있었다. 현장에 있던 남성들은 여성 노동자들이 먼저 구조되도록 돕다가 결국 참변에서 벗어나지 못했다. 그들의 숭고하고 의로운 행동에 남녀는 없었다. 그저 서로를 도와주고 지켜 주고 싶은 마음이 있었을 뿐이다. 되돌아보면 이러한 마음이야말로 바로 우리 자신의 진심이자 본모습이라 할 수 있을 것이다. 남혐과 여혐을 떠나 실은 함께 돕고 배려하며 같이 살아가고자 하는 진심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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