목표가 분명하고 주체적인 독서를 하자
서점에 가보면 한 달에 백 권 읽기, 천 권 읽기에 관한 책이 많이 보인다. 그걸 보는 대부분은 내심 따라갈 수 없는 갭을 느끼며 의기소침해지거나 자포자기하는 감정을 느끼기도 한다. 맞벌이가 대세인 지금, 직장인들도 한 달에 수백수천 권을 읽는 것이 과연 가능할까? 일단 물리적인 시간을 생각해 본다면, 출퇴근이나 대기 시간, 퇴근 후 자투리 시간 등을 모두 생각해 보아도 현실적으로 하루에 두세 시간 이상은 내기 힘들다. 한 달이면 약 60~90시간 정도를 내는 폭인데, 매달 30권만 읽는다 해도 독서 시간은 불과 권당 2~3시간 정도가 될 뿐이다. 가벼운 에세이나 시집, 만화, 짧은 소설 등을 제외한다면, 권당 2~3시간의 시간은 책 한 권을 제대로 음미하기에는 턱없이 부족한 시간이다. 결국 속독의 기술을 익히는 수밖에 없다는 결론이 나오고 만다. 그래서인지 주변에서 속독에 관한 책이나 속독 학원을 발견하는 것은 그리 어려운 일이 아니다.
과연 이 시대의 우리에게 유익한 독서는 어떤 독서인 것일까? 다독인가? 정독인가?
다독과 정독을 적절히 활용하며 의미 있는 독서 생활을 유지하려면 먼저 독서의 목적과 목표를 정확히 할 필요가 있다. 다독이 목표가 되면 무조건 많이 읽는 것에 치중되어 깊이가 얕아질 것이고, 정독이 목표가 되면 깊이 읽는 것에 빠져 자칫 지치거나 일 년 독서량이 불과 몇 권 정도에 그칠 수도 있기 때문이다. 즉, 무엇을 위해 독서를 하려는 것인지 분명해야 그 목적에 맞게 다독과 정독을 할 수 있다. 또한 목적이 분명해야 다독과 정독이 갖는 병폐 및 단점에 빠지지 않고 장점만 취할 수 있다.
사람은 언어적 표현보다 비언어적 표현인 분위기, 제스처, 눈빛, 표정, 몸짓 등에서 6~7배나 더 많은 정보를 얻는다고 한다. 그렇다 보니 독서를 통해 이해할 수 있는 저자의 의도는 실제로 얼마 되지 않는다. 그래서 저자들은 가끔 독자의 서평을 보고 놀랄 때가 있다. 자신의 글에서 정작 본인은 생각지도 못했던 부분을 독자가 이야기할 때가 있기 때문이다. 독자 역시 마찬가지다. 저자강연회에 참석하면 종종 자신이 이해한 것과 다른 측면을 설명하고 있는 것을 보게 된다. 이처럼 독자는 의외로 저자의 의도를 다르게 이해하는 경우도 많다. 왜일까?
책을 읽는 주체인 독자의 내면세계는 저자와 완전히 다르기 때문이다. 때문에 저자의 관점과 의도 및 지식이 독자의 내면세계라는 필터를 통과하면서 걸림, 반사, 굴절, 왜곡 등이 생기는 것이다.
결국 나 자신의 지식 스펙트럼이나 세상을 바라보는 관점이 넓지 못하면 보는 것이 한정된다. 사람은 자기 깜냥만큼만 보기에 크게 새롭고 판이한 것은 보지 못한다. 즉, 자신의 그릇을 넘어선 것을 이해하거나 발견하는 게 쉽지 않은 일이다.
따라서 사람은 자기가 알거나 믿는 것 이상으로는 상상하지 못하고, 이해하지 못하며, 발견하지 못한다. 그러므로 세상을 더 많이 보고 올바로 이해하며 좀 더 새로워지기 위해서는 자신의 내면세계를 확장하고 그곳에 한층 다양한 빛깔을 불러들일 필요가 있다. 그러므로 읽기에 있어서도 좀 더 목표를 분명히 하는 것이 독서의 목적에 한결 가까워지는 길이 된다. 즉, 외부 세계를 읽고 이해하는 주체는 나의 내면세계이기에 독서의 목표 역시 나의 내면세계를 확장하기 위한 독서가 되어야 할 것이다.
독서를 통해 우리가 얻는 이점은 명확하다. 지식의 확장, 지혜의 확장, 관점의 도약, 세계관의 확장 등이다. 하지만 좀 더 깊이 생각해보자면, 이렇게 잘 알려진 독서의 효과는 결과적이고 외면적인 효과이다. 본질적인 측면에서 독서의 가장 큰 효과는 바로 독자의 내면세계를 발견하고 주체성을 분명히 하여 삶의 중심을 잡아주는 데 있다. 그것을 두 가지로 요약하자면, 다음과 같다.
첫째, 독서는 나의 내면세계와 만나게 해주는 좋은 매개체가 된다.
전문지식과 정보의 창고, 또 다른 세계와의 만남, 간접경험과 감정 순화의 도구 등... 이미 널리 알려진 다양한 독서의 효용성이다. 그런데 독서는 그보다 더 본질적인 가치를 우리에게 던져준다.
아무리 가벼운 책이라도 사람마다 그 안에서 보는 것이 다르다. 또 어떻게 보느냐에 따라 발견하는 것도 다르다.
비슷한 원리로 불교에는 화두 공부라는 게 있다. 사실 화두 자체는 별 대단한 것이 아니다. 그저 단순한 질문이다. 하지만 간단한 화두는 오히려 복잡한 내면의 답을 떠오르게 하는 매개체가 되어 준다. 중요한 것은 독서를 통해 내면세계를 자극하여 평소에는 느낄 수 없었던 자기 내면세계를 관찰할 수 있다는 점이다. 바로 다른 저자의 생각에 반응하는 나의 느낌과 생각을 통해 나의 내면세계를 거울처럼 보게 해주는 것이다. 즉, 저자의 뜻을 이해하기 위해 자신의 세계로 새로운 세계를 탐색하고 이해해 가는 과정에서 자신의 세계를 더 잘 알게 되는 것이다.
둘째, 나의 내면세계에 다양성을 불어넣어 변화를 일으키기 위한 것이다.
책을 통해 각양각색의 저자의 다양한 지식과 관점을 읽는 것은 나의 내면에 다양한 세계를 초대하는 것이다. 그리고 이처럼 다양한 관점과 지식이 주는 자극은 내면세계에 변화를 이끈다.
이는 생명이 한 가지 영양분만으로는 살아갈 수 없는 것과 같다. 성장 단계에는 더 많은 영양분이 필요하며 우리가 주로 섭취하는 단백질·탄수화물·지방 이외에 셀레늄, 마그네슘, 아연 등의 다양한 미세영양소가 복합적으로 필요한 것과 같다.
그런데 주변의 환경이 늘 똑같고 자극이 한정적이면 자신에게 필요한 자극을 얻기도 쉽지 않고, 좀 더 큰 성장을 이루기 위한 다양성을 경험하기도 쉽지 않다. 그럴 때 읽기는 다른 이의 정신세계 및 생활환경과 조우하게 해주는 또 다른 문이 된다.
사실 다양성을 얻는 방법은 독서 말고도 많다. 그럼에도 독서를 통해 다양성을 얻는 것이 내면세계를 변화시키는 데 더 효율적이라 말할 수 있는 근거란 무엇일까?
그것은 사람의 변화는 외부 활동이나 외면에서 오는 변화보다 정신적 교류를 통해 내면세계에서 일어나는 변화가 더 본질적이고 강력하기 때문이다. 본래 자연에는 관성이란 것이 있다. 이것은 자연뿐 아니라 사람에게도 유효하다. 늘 해오던 것을 옳다고 느끼며, 하던 대로 그냥 하는 것을 더 편안히 여겨 안주하고 마는 것, 익숙함을 안전함이라 느끼며 계속 유지해가려 하는 사람의 속성, 그것이 바로 ‘생각의 관성’이다. 생각의 관성은 자신과 다른 그 무언가를 만나 자극받지 않으면 좀처럼 깨어지지 않는다. 기존 방식을 유지하는 데서 오는 편안함과 안전감은 우리 본성에 아주 잘 맞기 때문이다. 기존과 다른 낯섦이 불안하고 불편한 것은 어쩔 수 없는 것이다.
하지만 살아있는 연어가 더 큰 목적을 위해 물을 거슬러 상류로 올라가듯, 사람 역시 계속 자신의 본성을 거슬러 가야 한다. 왜냐하면 생각의 관성에 머물다 보면 고인 물처럼 획일화되고, 획일화된 머리에서는 창조성이 나오지 않기 때문이다. 하나의 빛깔에 고착되면 다른 색을 드러내는 것에 불안과 불편을 느끼면서 기존 세계에 안주하게 되는 것이다. 독서는 생각에 관성을 멈추게 하여 획일화된 고인물이 되지 않도록 다양성을 불어넣는 물꼬와 같다.
독서는 더 많은 관점과 지식을 겹쳐 봄으로써 더 많은 창조와 창의성을 불러일으킨다.
4차 산업혁명의 끝에서 5차 산업혁명을 엿보고 있는 지금. 건물 스스로 전기와 물을 생산해 분배하고, 태양열로 동작하는 공장과 자동차 등이 인공지능 로봇화되어 스스로 움직이는 세상이 일상이 되면 어떠할까? 천연에너지로 스스로 동작하는 스마트팜에서 프리에너지로 채소와 육류가 생산되고, 노동이 필요한 곳에서 에너지 프리인 로봇들이 일을 한다면 인간의 가치는 또 어떻게 달라질까?
머지않은 미래에, 인간은 한정된 자원을 두고 다투지 않으며 인간의 노동력은 로봇이 대체함으로써 인간은 좀 더 인간다운 일에 집중할 수 있게 되리라 기대한다. 곧 다가올 그 세계에서 최고의 가치는 바로 인간만이 할 수 있는 무한한 상상과 창조력 그리고 윤리적 감수성이 될 것이다. 그리고 그런 시대에 필요한 인간만의 창조력 계발은 독서를 통한 다양한 관점과 세계관, 그리고 더 큰 상상과 조우함으로써 가능할 것이다. 독서는 그러한 측면에서 미래 역량을 대비하고자 하는 이들의 가장 손쉽고도 중요한 무기가 되어줄 것이다.
“책을 통해서 밝아진 이 마음이 유지된다. 책을 읽으면 이 마음이 항상 유지되지만 책을 읽지 않으면 의리를 알려고 해도 끝내 알 수가 없다.” (근사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