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9월 하순의 일기(日記)
9월 13일
9월 중순, 추석이 낼모렌데 바깥 날씨가 34도를 오르내리네요. 가을맞이하기가 이렇게 어려운 해는 처음 봅니다. 세상살이가 팍팍해졌다고들 하는데 기후마저 제정신이 아닌 듯합니다. 북한에서는 어제 아침, 동해를 향해 단거리 미사일 여러 발을 발사하고 국회의원들은 추석 휴가비로 424만 원을 받아 갔다고 합니다. 단돈 십 원 쓰기도 망설여지는 판국에 대내외 정세는 어지럽기 짝이 없으니 답답하기만 합니다. 오늘 아침, 하늘은 잔뜩 찡그린 얼굴로 세상을 내려다보고 있네요. 더도 덜도 말고 한가위만 같아라 하시던 옛 어른들 말씀이 가물가물합니다.
9월 14일
명절 연휴 기간에 읽을 책을 빌려왔습니다. 아파트 바로 앞에 도서관이 있어서 가끔 축복받았다는 생각이 듭니다. 김훈 소설 두 편(하얼빈, 흑산)과 2023년 이상문학상 작품집을 빌렸습니다. 구수한 간식거리가 생겼으니 한결 든든해 집니다. 침침한 눈이지만 뒷심 좋게 읽어볼 참입니다.
9월 16일
어제 저녁과 오늘 새벽에는 제법 가을다운 바람이 불었습니다. 이 세상에 '끝'이 없는 것은 없을 겁니다. 이 여름 더위도 드디어 그 '끝'에 이르렀나 봅니다. 이성복 선생의 시 '그 여름의 끝'이 생각납니다.
그 여름의 끝
이성복
그 여름 나무 백일홍은 무사하였습니다 한차례 폭풍에도 그다음 폭풍에도 쓰러지지 않아 쏟아지는 우박처럼 붉은 꽃들을 매달았습니다.
그 여름 나는 폭풍의 한가운데 있었습니다 그 여름 나의 절망은 장난처럼 붉은 꽃들을 매달았지만 여러 차례 폭풍에도 쓰러지지 않았습니다.
넘어지면 매달리고 타올라 불을 뿜는 나무 백일홍 억센 꽃들이 두어 평 좁은 마당을 피로 덮을 때, 장난처럼 나의 절망은 끝났습니다.
9월 17일
옅은 구름 너머로 한가위 보름달이 흘러갑니다. 달은 서둘 것도 없고 주저할 것도 없이 미끄러지듯 흘러갑니다. 저 달만큼이나 넉넉하고, 편안하고, 여유롭고, 자유로웠으면 좋겠습니다. 늘 거기 있어 왔던 길을, 늘 그래왔던 것처럼 아무런 거리낌도, 아무런 두려움도 없이 '그냥', 그대로 흘러갑니다. 오늘 밤, 한가위 달을 바라보면서 '그냥'이란 말을 곰곰이 생각해 봅니다. 그냥 그대로 아무 탈 없이, 물 흐르듯 달 흐르듯 가을이 왔으면 좋겠습니다. 그렇게 이 해를 보냈으면 좋겠습니다.
9월 19일
생전 경험해 보지 못하던 9월 더위는 오늘이 고비라고 합니다. 오후에 한 차례 비가 쏟아지고 나서부턴 기온이 푹 꺾인다 하니 다행입니다. 뭐 이런 경우가 다 있을까요. 9월도 하순으로 접어들었는데 가만 앉아 있어도 땀이 흐르니 참말로 봬('부아'의 충청도 사투리)가 납니다. 늦은 더위, 미친 춤 바람에 조금 더 빨리 늙었습니다. 끌끌.....
동부간선도로가 출근 차량들로 가득합니다. 추석 연휴를 끝내고 일터로 나가는 발걸음들이 무거워 보입니다. 그래도 어쩌겠습니까. 회삿밥, 눈칫밥에 이리 치이고 저리 치이며 또 하루를 견뎌야 하니…… 인생 참 별거 없습니다.
9월 20일
몸살을 심하게 앓다가 며칠 지나고 나면 이불을 뒤집어쓰고 있어도 식은땀 범벅이 됩니다. 그렇게 혼몽하게 하룻밤을 보내고 나면 어느새 몸살은 뚝 떨어지고 서서히 시야가 맑아집니다. 오후 내내 비가 오고 있습니다. 이 비가 아마도 몸살 뒤에 오는 식은땀일 듯싶습니다. 내년엔 착한 여름을 만날 수 있을까요. 지구 온난화 등쌀에 못 이겨 내년에도, 후년에도, 아마 그 이후에도 불볕 여름은 계속될지 모릅니다. 이게 다 졸렬한 인간들 소행일 테니 어디 삿대질할 곳도 없습니다. 참 사나운 여름이었습니다.
9월 21일
내일이 드디어 추분(秋分)입니다. 추분이면 다를 게 뭐 있겠습니까만 열병 앓고 있는 세상을 가을바람이 다소라도 식혀주었으면 좋겠습니다. 계엄령을 준비하고 있느냐, 아니다, 통일하지 말고 각자 살아야 한다, 아니다, 선거법 위반으로 2년을 살아야 한다, 아니다, 해리스가 트럼프를 앞섰다, 아니다 …….
횡단보도 옆에서 과일 행상하는 노인네에겐 이게 모두 달나라 이야깁니다. 사람들 틈에 끼여 졸면서 퇴근하는 우리 딸에게도 줄줄이 난해(難解)한 문장입니다.
하긴 태초 이래, 태평성대가 있기는 있었을까요. 이 어지러운 세상을 내려다보고 있을 하느님은 또 얼마나 심란(心亂)할까요.
그래도, 내일은 추분! 비 그친 개천을 쓸며 지나오는 바람이 서늘합니다. 서늘한 토요일, 예감이 좋습니다.
9월 22일
삼남 지방에는 비가 많이 왔다지요. 특히 부산 쪽엔 피해가 큰 듯합니다. 더 큰 피해가 없었으면 좋겠습니다.
시를 읽다가 이준관의 ‘비’를 만났습니다. 떨어지는 그 누군가에게, 아픔에 겨워 힘들어하는 그 누군가에게, 내가 기꺼이 풀이 될 수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요.
우리 사회 곳곳에 완충지대가 필요하다는 생각도 들었습니다. 맨몸으로 부딪치는 모든 것들에게 상처 나지 말라고, 더 아프지 말라고 서로 보듬고 어루만져주는 그런 사회, 그냥 부질없는 소망일 뿐이겠지요?
비
이준관(1949- )
비는 아프다.
맨땅에 떨어질 때가
가장 아프다.
그렇다.
맨땅에 풀이 돋는 것은
떨
어
지
는
비를
사뿐히 받아 주기 위해서다.
아픔에 떠는
비의 등을 가만히
받아 주기 위해서다.
9월 23일
안식구가 눈썹이 흐려져 문신을 한다기에 덜렁덜렁 따라와 대기실에 앉아 있습니다. 한 시간 반은 족히 걸린다는 말이 무슨 겁박처럼 느껴져 들고 온 책을 서둘러 열었습니다.
- 반역으로 나라가 망하고 외침으로 나라가 주저앉았다는 역사는 서책에서 읽었으나 문서를 써주고 나라를 넘기는 일은 만고에 없습니다. 폐하, 저들이 세력의 강약을 들어서 겁박을 해오면 오직 강상과 인륜으로 대항하소서. 오백 년 사직이 폐하를 외호하고 있사옵니다. -
을사조약 이후 임금에게 올린 상소문입니다. 작가 김훈이 쓴 소설 '하얼빈'은 마음을 천천히, 그러면서 속속들이 타오르게 합니다.
가을이 손바닥 넓이만큼 노닐다가 훌쩍 떠나버릴 모양입니다.
9월 26일
시장에 배추김치가 품절이라고 합니다. 배춧값이 많이 오른 탓이지요. 그래서 오늘 아침엔 총각무와 양파를 썰어 넣고 푹 지져 먹었습니다. 맛이 일품입니다. 요즘 주로 어떤 반찬들 해 드시나요? 백수가 되고 보니 '의식주' 중에 '식'이 가장 큰 관심거리가 되었습니다. 오늘 아침엔 잡곡밥에 어묵탕, 마른 김, 방울토마토, 파김치, 양파 넣고 지진 무, 찐 계란, 사과 반쪽을 먹었습니다. 뭐 좋은 반찬거리 없을까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