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는 토요일과 일요일에는 늘 숨어 지냈다. 거실에 앉아 티브이를 보면서 뒷다리가 잘린 강아지를 불쌍해 하거나 조선 시대 도자기나 그림, 글씨 등의 값을 알아맞히는 일 따위에 골몰해 있었다. 대여섯 살 어린아이가 ‘동백 아가씨’를 애타게 부르는 모습에 어이없어 했고 복면 속 가수의 얼굴을 궁금해 하다가 소파에 쓰러져 잠이 들 때도 있었다. 토요일과 일요일의 티브이 프로그램은 시간대 별로 줄줄 외우고도 남을 정도였다. 그것이 우리에게 생겨난 코로나 19의 심각한 증상이었다.
우리는 가끔 사회적 거리두기 2단계가 적용되고 있는 창문 밖 세상을 내다봤다. 10월 초순의 하늘은 구름 한 점 없이 맑고 푸르렀다. 바람에 씻긴 망우산 갈참나무 잎사귀들이 부드럽게 흐느적거렸고 중랑천 물길을 따라 왜가리와 가마우지들이 한가롭게 오르내렸다.
동부간선도로는 도시를 벗어나려는 승용차들로 가득했다. 차량의 행렬은 더디기 짝이 없었다. 우리는 따뜻한 아메리카노를 마시면서 저 행렬 속에 우리가 끼어있지 않음을 고마워했다.
그리고 한가로운 수요일, 점령군처럼 뿌듯한 마음으로 국도 75호선을 따라 북상했다. 길은 청평호를 가로질러 산과 산 사이를 지나 가평천 상류를 향해 이어져 있었다. 나무숲이 바람에 흔들릴 때마다 산은 마치 낮술에 취한 듯 몸을 흔들었고 계곡물에 비친 햇살이 물결을 따라 일렁거렸다. 중국 진나라 때, 전란을 피해 산속으로 들어갔던 사람들이 무려 500년 동안이나 세상과 단절되어 살았던 곳, 무릉도원이 떠올랐다. 우리는 마스크를 벗었다. 가평천 상류야말로 코로나 19의 난리통에서 벗어난 무릉도원이었다.
우리는 사람들이 적게 몰리는 시간에 점심을 먹기로 했다. 11시 10분쯤, 용소폭포 근처에서 차를 돌렸다. 한참을 내려와 자라섬 가까이에 이르러 길가 식당으로 들어갔다. 식당 안은 텅 비어 있었다. 체온을 측정하고 방문자 기록 장부에 인적 사항을 적었다. 한적한 구석 자리에 앉아 갈치조림을 주문했다. 비말(飛沫)이 튀길 일은 전혀 없었다. 일찌감치 마스크를 벗었다. 마음 편히 외식할 수 있다는 게 무슨 행운처럼 느껴졌다.
두툼한 갈치와 갓 지어낸 쌀밥 맛에 취해 있는 동안, 새 손님들이 들어왔다. 공교롭게도 그들이 앉은 자리는 우리 바로 옆 테이블이었다. 60대 후반으로 보이는 남자 하나와 여자 두 사람이었다. 그중 몸집 좋은 여자는 마스크도 쓰지 않은 채였다.
자리에 앉자마자 몸집 좋은 여자가 어디론가 전화를 걸었다.
“야. 어떻게 하니. 그런 줄도 모르고... 나는 어저께 알았어. 마음 단단히 먹어. 너 하느님 신뢰하지? 하느님을 신뢰하면 다 알아서 해주실 거야. 기도도 열심히 하고... 그래, 어느 쪽이니? 왼쪽? 엉? 임파선까지? 다 절제해야 된대? 어쩜... 어떻게 하니. 그래. 하느님을 신뢰하면 돼. 하느님 신뢰하지? 꼭 낫게 해주실 거야. 나도 열심히 기도할게. 너 낫게 해 달라고... 그래그래. 마음 굳게 먹고... 또 통화하자. 그래. 몸조리 잘 해.”
여자의 목소리는 침울해 보였지만 홀 안에 울려퍼질 만큼 우렁우렁했다. 굵은 비말이 팍팍 튀어나오는 것 같아 우리는 갑자기 밥맛을 잃고 말았다.
통화를 끝낸 여자가 뭔가를 한동안 검색하는가 싶더니 옆에 앉은 여자에게 핸드폰을 내밀었다.
“이거 봐. 우리 시뉘가 손녀딸 봤댔지. 난 이렇게 못생긴 애는 첨 봤다니까. 킥킥. 시누이도 그러더라구. 꼭 원숭이 새끼처럼 까만 게 한동안 보기 싫어지더라구 말야. 킥킥. 이거봐. 이거봐. 정말 못생겼지? 킥킥킥.... 아. 그런데 아까 어느 쪽이랬지? 왼쪽였나, 오른쪽였나.”
여자의 목소리는 침울 모드와 명랑 모드를 순식간에 오르내렸다.
여자가 다시 전화를 걸었다.
“아. 참. 너 아까 어느 쪽이랬지? 왼쪽? 그랬구나. 그래. 너 하느님 신뢰하지? 신뢰하면 다 낫게 해주실 거야. 그래그래. 잘 있어. 나도 열심히 기도할게.”
우리는 서둘러 자리에서 일어섰다. 식당 문을 나서는 내 뒤통수에 여자의 웃음소리가 도깨비바늘처럼 마구 들러붙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