벌써 십수 년째 파킨슨병을 앓고 있는 큰누님은 나를 만날 때마다 걱정이다.
“오갈 때 차 조심하고 어디 다치지 않게 늘 챙겨야 돼.”
24시간 상주하는 요양보호사가 있어서 큰 걱정은 덜었지만 자유롭지 못한 팔 다리 때문에 늘 불안하다. 기저귀를 차고 생활한 지도 벌써 1년이 넘었다. 아직 정신은 명료해서 옛날 일들을 또렷하게 기억한다. 1940년생, 용띠인 큰누님은 만고풍상을 다 겪으면서 살았다.
사오 년 전만 하더라도 친구들 모임에 빠지는 일이 없었다. 이제는 그 친구들을 만날 수 없는 처지가 되었다. 친구라곤 문갑 위에 올려놓은 TV가 전부다. TV는 친구이자 세상을 내다보는 창문이다. 정치인들의 동태는 물론 연예인들의 사생활까지도 훤히 꿰고 있다. TV 보는 시간이 길어질수록 치매에 걸릴 확률도 높아진다는 기사를 읽은 적이 있다. 그 바람에 걱정이 하나 더 늘었다.
아침 일찍, 누님 댁을 찾았다. 18평 복도식 아파트에 세간살이는 지극히 단출하다.
“컨디션은 좀 어때요?”
“너도 내 나이 되어 봐라. 땅속에 있든 땅 밖에 있든 다를 것이 없다.”
생사를 초월한 듯한 한마디에 오히려 웃음이 나왔다.
은행 통장 관리는 동생인 내가 도맡아 한다. 생활비 통장엔 1,700만원이 들어 있다. 1년 전보다 100만원이 늘었다.
“이 돈 다 어디에 쓰실 거여?”
“내 장례비로 쓸 거다.”
요양보호사 급여는 주택연금에서 나오는 돈으로 충당한다. 만 84년 동안 살고 있지만 재산이라곤 집 한 채와 매월 들어오는 연금이 전부다.
아침 TV에선 어린아이들이 나와 노래를 부르고 있다.
‘사랑도 부질없어 미움도 부질없어
청산은 나를 보고 말없이 살라 하네
버려라 훨훨 벗어 버려라 훨훨
사랑도 미움도 버려라 벗어라 훨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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탐욕도 성냄도 버려라 벗어라 훨훨훨’
열한 살짜리 여자아이가 노래 곡조를 청승맞게 꺾어 돌린다. 세상 다 산듯한 표정이 일품이다. 패널은 놀랍다는 듯이 이야기한다.
“이 정도 실력이면 타고난 천재라고 할만합니다.”
호들갑을 피우는 패널들의 수다에도 아랑곳없이 누님은 멀뚱하게 TV 화면만 바라본다. 애들이 부르는 어른 노래를 한참 듣고 있다 보니 정말 치매에 걸리는 건 아닐까 걱정된다.
불쑥, 애들이 부르는 애들 노래가 그리워진다.
‘가을이라 가을바람 솔솔 불어오니
푸른 잎은 붉은 치마 갈아입고서
남쪽 나라 찾아가는 제비 불러 모아
봄이 오면 다시 오라 부탁하누나.’
어릴 적, 뒤뜰 호두나무 그늘 아래에서 누님 손잡고 부르던 노래다. 봄이 오면 다시 찾아오는 제비처럼 우리 누님의 청춘도 다시 찾아왔으면 좋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