열차 안은 붐볐다. 다행히 남은 자리가 있었다. 대학생으로 보이는 여학생 옆에 앉았다. 그녀의 무릎 위에는 책 몇 권이 가지런히 놓여있었다. 주변을 둘러보는 척하면서 슬쩍 훔쳐 보았다. 옅은 하늘색 원피스가 눈에 부셨다. 오똑한 코에 하얀 얼굴이 가을물같이 맑아 보였다. 언뜻 무릎 위에 있는 책 제목이 눈에 띄었다. '심리학 개론'이었다. 다음 역에서 내려야 하는데 그러고 싶지 않았다.
나는 가방에서 책 한권을 꺼냈다. 그리고는 페이지 한쪽 빈 구석을 찾아 급하게 썼다. '나는 내 책 갈피의 한쪽을 잃어버립니다. 주인을 찾아주십시오.' 끝에는 내 전화번호를 적었다. 그런 다음, 메모가 적힌 페이지 한쪽을 슬그머니 찢어냈다. 다음 역까지는 5분도 채 남아있지 않았다. 마음이 급해졌다. 가슴이 두근거렸다. 나는 부드러운 어조로 여학생에게 물었다. 결사적인 용단이었지만 결코 티를 내지 않았다. '저.... 그 책 좀 잠깐 볼 수 있을까요?' 나는 그녀의 무릎 위에 놓여있는 '심리학 개론'을 가리켰다. 여학생이 나를 잠깐 건너다 보았다. 그리고 나서 스스럼 없이 책을 건네줬다. 나는 책을 받아들고 내용을 살폈다. 글자가 눈에 들어올 리 없었다. 30초나 지났을까. 나는 내 책에서 찢어낸 쪽지를 여학생 책 갈피 어딘가에 끼워넣었다. 책을 건네주고 목례를 끝내자마자 열차는 정거장에 들어섰다.
사흘이 지난 어느 날, 전화를 받았다.
'깜짝 놀랬어요. 잃어버리신 거 돌려드려야지요. 삼각지 로터리에 또보기 다방이라고 있어요.'
그날처럼 가슴에 방망이질을 당해 본 적이 없었다. 약속한 날 아침, 주인집 안마당엔 보라색 나팔꽃이 활짝 피어 있었다. 그로부터 42년이 흘렀다.
창문 너머로 설거지하는 아내의 어깨가 보였다. 마당엔 그때처럼 보라색 나팔꽃이 웃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