페르세포네와 하데스를 화해시키기 위해 오르페우스는 자신의 작업에 몰두한다. 헤르메스가 ‘축복’이라 언급하는 그의 재능은 ‘EPICⅡ’에서는 그의 눈과 귀를 강하게 틀어막는 저주처럼 보일 지경이다. 베푸며 시와 곡을 쓰는 게 익숙한 오르페우스와 달리 바람에 익숙하고 시련에 익숙한 에우리디케는 오르페우스의 상황을 이해하지 못한다. 당장 에우리디케에게는 배를 채울 먹거리와, 바람을 피할 옷이 필요하다. 가진 대로 누리며 만족하며 살라는 페르세포네의 말에 유일하게 에우리디케는 공감하지 못한다. 되려 신들과 사람들이 하데스타운의 지독함에 대해 설명하는 걸 듣고 흥미를 보일 정도다. 그리고 하데스는 그런 에우리디케의 속마음을 간파한다. 에우리디케는 하데스타운과 지상에서의 삶 사이에서 고민한다. 자신이 기댈 수 있지만 반지도, 만찬도, 침대도 마련하지 못하는 오르페우스와 더 이상 굶주림과 고통이 없는 곳, 고통이 싫은 에우리디케는 후자를 선택한다.
하데스가 에우리디케에게 준 하데스타운으로의 티켓은 두 개의 동전이다. 그리스 신화에서 뱃사공의 뱃삯으로 사용하는 소재인데, 가난한 에우리디케라는 점에서 마치 꽃으로 대표되는 사랑, 꿈, 여타의 것보다는 자본을 택하는 모습으로 그려진다. 하데스타운으로 간 에우리디케는 하데스와 영혼과 하데스타운의 시민권을 거래하는 계약을 통해 더 이상 굶지 않을 수 있었으나 영원히 일을 해야 하는 상황에 처한다. 이때 에우리디케는 페르세포네의 물음에 답한다.
“계약했어?” “다른 방법이 없었어요.”
이런 계약을 쉬이 할 리는 없다. 하지만 다른 방법이 없는, 하데스의 거대한 판에서 움직이는 말이 된 것이다.
이곳에서 인부들은 구별되지 않는다. 같은 동작으로 같은 행동을 반복할 뿐이다. 획일화되고 기계화된 현대사회 속에서 인간은 자기 자신의 정체성을 잃고 사회의 한 부품으로 여겨진다.
그래서 에우리디케는 전형적인 현대인이다. 원초적인 삶의 방식을 살아가는 오르페우스에 비해 자본주의와 기계화 현대의 모습을 지향하는 하데스에게 에우리디케가 향하는 것은 당연하다. 에우리디케를 비롯한 현대인은 이렇게, 자신이 누군지를 잊고 사회의 부품으로 단체복에 끼워 맞춰 살아간다. 우리가, 그리고 에우리디케가 오르페우스라는 캐릭터를 매력적으로 느끼는 이유는 우리가 잊고 지낸 것, 예술을 넘어 꿈과 자유로운 삶에 대한 갈망을 상기시키는 존재이기 때문일 것이다. 에우리디케의 선택은 비난받아서는 안된다 운명의 여신들이 말한다. 우리 역시 사회의 다양한 벽에 마주하면 이와 비슷한 선택을 하며 살아가고, 그러기를 종용받으니까. 우리의 대변자이자 가장 닮아있는 존재인 에우리디케 역시 그와 같다. 하지만 에우리디케가 마음속에는 꽃을 품었으며 오르페우스에게 자신을 찾아달라는 노래를 불렀고, 결국 오르페우스는 에우리디케를 찾아왔다.
지금의 벽에 좌절하는 것은 문제가 되지 않는다. 하지만 당신들 마음속 꽃을 잃지 않기를 바란다. 그 꽃을 떠올리며 노래를 부르면 언젠가 어떤 형태로든 오르페우스가 당신들을 찾아올 거라고 믿기를. 그렇기에 동전을 택한 에우리디케와 다른 사람, 그리고 자기 자신에게 돌을 던지지 않기 바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