레드북의 막은 로렐라이 언덕에서 출판된 레드북이라는 책의 표지다. 그리고 무대의 막이 오르면 관객은 커다란 레드북이라는 책 속으로 들어간다. 하지만 첫 넘버인 '난 뭐지'부터 책 속 사람들의 이야기는 유쾌하지 않다. 동화책 등장인물의 삶이라고 하기에는 지나치게 우울한 이야기가 팽배하다. 그럼에도 그들의 어조나 태도는 우울하지 않다. 당연한 일이다. 이 모든 이야기는 책에서 일어나는 일이니까.
관객은 안나가 옳다는 사실을 알고 있다. 아무리 우리가 살아가는 현실이 공평하지 않더라도 19세기의 사람들이 가진 인식보다는 보다 발전했기 때문에. 관객은 구구절절 옳은 말을 하는 안나, 우리의 주인공에게 자연스럽게 동화된다. 이 과정을 통해 관객은 보다 자연스럽게 안나가 들려주는 이야기를 중점적으로 극을 바라보게 된다. 단순히 안나가 주인공이어서가 아니라 안나의 태도와 행동은 자연스럽게 그녀를 우리가 읽는 책의 주인공으로 만들었다.
이제 우리 동화 속 주인공이 가진 능력을 살펴보자. 어른들의 동화인 이 책은 주인공에게 동물과 이야기하거나, 마법 지팡이나 요정의 축복을 내리지 않았다. 더 이상 어른들은 그런 마법을 믿지 않기 때문이다. 하지만 어른들에게 마법보다 더 비현실적인 솔직함과 당돌함을 가졌다. 전형적인 동화와 다른 모습이다. 안나는 자신을 위한 백마 탄 왕자가 나타나기를 기다리나, 불의를 참고 견디지 않는다. 대신 여차하면 떠나고 여차하면 혼자 하고 여차하면 차(?) 버린다. 관객은 동화 같은 배경 속 이질적으로 움직이는 안나를 통해 어색함을 느끼지만 이내 그 어색함보다 즐거운 마음이 앞서게 된다.
누구나 한 번쯤 바랐을 속 시원한 소위 '사이다' 같은 안나의 행보에 관객들은 희열을 느낀다.
레드북의 갈등 양상에 대해 이야기해보자.
레드북의 주된 갈등은 우릴 대변하는 안나와 사회 간의 갈등이다. 물론 브라운이나 여타 인물들과 갖는 갈등 역시 존재하나 사회와의 갈등이 가장 두드러진다.
레드북은 영국 빅토리아 여왕 시대에 그 사회가 요구하는 이상적인 여성상과 그에 정 반대되는 어딘가 특이한 여성 안나와의 갈등이 그 주를 이룬다. 우리가 익히 생각하듯 사회에 뿌리 깊게 박혀있는 관념적인 생각은 쉬이 바뀌지 않을 것이다. 심지어 지금까지 내려오고 있으니 말이다.
하지만 레드북에서는 그 갈등의 해결이 아주 빠르다. 노래 한 곡에 재판관들이 마음을 바꾸기도 하고, 변호사가 거절하려던 피고를 변호하기로 결심하고, 해외로 추방당하려던 작가가 한평생 글을 쓰도록 격려 같은 종용을 받기도 한다. 만약 사실적인 방식으로 스토리와 무대를 구성했다면 이런 갈등 해결은 나타날 수 없었을 것이다. 하지만 파스텔톤의 동화책 한 장면 같은 무대, 그리고 장면 연출들, 그에 힘을 받은 동화 같은 이야기로 인해 관객은 이런 급작스럽고 빠른 전개와 갈등 해소에 이질감을 느끼지 않는다. 그 이유는 간단하다. 관객이 이 극을 일종의 동화로 인지하고 있기 때문이다. 우리는 어린 시절 마법에 걸린 야수를 왕자로 돌려놓은 미녀의 키스나, 요정이 나타나 만들어준 호박마차와 유리구두에 대해 익히 들어왔다. 갑작스러운 변화와 갈등 해결에 어쩌면 익숙한 사람들일지도 모른다는 뜻이다.
동화의 의의와 본질이 아이들에게 꿈같은 이야기를 들려주며 희망을 심어주고 즐거움을 선사하는 데에 있다면 레드북의 본질 역시 그곳에 있다. 관객들, 특히 주요 관객층인 청년층이 듣고 싶어 하는 어쩌면 꿈같이 여겨지는 이야기를 통해 희망을 전하고 즐거움을 선사하는 것이다. 우리는 이 얼렁뚱땅 인, 어딘가 특이하지만 정감 가고 사랑스러운 이야기 속에서 즐거움을 찾는다. 때로는 완벽할 필요가 없음을 레드북은 우리에게 보여준다. 빈 틈도 있고 제멋대로일 수 있다. 아무래도 좋다. 어쩌면 우린 누군가가 이런 말을 우리에게 해주기를 아주 어린 시절부터 기다렸을지 모른다. 같은 동화를 보고 자랐어도 완벽하게 같은 모습으로 자란 사람은 없다. 레드북 또한 마찬가지다. 캐릭터들에게 그리고 우리에게 제2, 제3의 안나가 되기보다는 우리 자신이 되라고 말한다. 이 동화를 읽고 자라난 어른은 어떤 모습이 될지 기대하며, 그게 아마 동화를 쓴 작가의 마음이지 않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