피아노에 조예가 깊지 않은 내 입장에서 바라본다면 제니의 연주는 두 손을 수갑에 묶은 채 뒤돌아 연주한 연주와, 마지막 4분의 폭발적인 연주에 기교나 연주적인 큰 차이를 느끼지 못한다. 하지만 크뤼거의 제니의 연주에 대한 태도는 분명히 다르다. 두 손이 수갑에 묶인 채로 하는 제니의 연주는 보는 사람으로 하여금 탄성을 자아내게 만든다. 그리고 교도소장은 그런 제니의 모습이 '신선하다.' 따위의 말을 붙여 촬영을 종용한다. 그런 제니의 연주는 크뤼거에게 재능을 죽이는 행위, 더 나아가 자기 자신을 죽이는 행위로 여겨졌을 거라 생각한다. 크뤼거와의 레슨을 시작하기 전 제니는 지속적으로 손을 물고, 할퀴고, 뜯는 일종의 자해 행위를 반복한다. 자기 자신의 머리를 치거나 바닥을 두드리는 모습 역시 보이지만 가장 두드러지게 눈에 띄는 부분은 역시 손에 대한 자해다.
여기서 자해에 대해 짚고 넘어가 보자. 자해 자발적으로 자신의 신체에 손상을 입히는 행위 주로 좌절과 분노를 해소하고 자신의 신체 및 자아에 대한 확인, 죄의식을 줄이기 위한 수단으로써 자해 행동이 사용된다.
제니는 끊임없이 자신의 손에서 비롯된 죄의식을 표출하고 그 동시에 손을 확인한다. 제니에게 자신의 손, 더 나아가 피아노를 치는 손은 자신이 살아있음을 증명할 수 있는 유일한 수단이기 때문에. 크뤼거는 그런 제니가 자신을 해하는 방식으로 연주하는 것을 용납하지 않았다. 크뤼거에게 그런 제니의 행동은 재능을 죽이는 것, 제니 스스로를 죽이는 것으로 여겨졌을 것이기 때문. 제니의 의도와는 관계없이 말이다. 인간은 누구나 자기 스스로를 사랑하며 살아간다. 이는 인간이 삶을 영위하기 위한 가장 기초적이고 필수적인 부분이다. 하나 크뤼거와 제니는 이 부분에 대한 결핍을 가지고 있다. 자신이 지키지 못한, 자신이 사랑했다고 인정하지 못한 존재에 대한 죄책감이 자신을 사랑할 수 없게, 증오하게 만든다. 그리고 이 둘은 처음으로 자신이 사랑하던 것에 대해 인정하며 변화를 겪기 시작한다. 제니는 잃어버린 자신이 사랑했던 아이의 존재에 대해 말하고, 크뤼거는 지키지 못한 한나에 대한 사랑을 논한다. 둘은 서로를 통해 마침내 자신이 사랑하던 것에 대해 인정할 수 있게 되었고 사랑하였노라 말한다. 그리고 그 사랑에 대한 인정은 결국 자신 스스로를 사랑할 수 있게 만드는 원동력이 된다. 크뤼거는 주변보다 자신이 사랑하는 것을 빛나게 만들 수 있는 용기를 얻어 본인이 언제나 꿈꾸고 사랑한 재능을 세상에 내보이기 위해 달린다. 그리고 제니는 그런 크뤼거의 손을 잡고 달려 콩쿠르장에 간다.
이 극의 메인 넘버의 제목이자, 그 넘버에 끊임없이 등장하는 '문'은 여러 가지가 될 수 있지만 용기를 내라는 말이 가장 일반적이고 통상적인 해석이 될 것이라 생각한다.
'그러니, 그러하니 너의 문을 열어라.'
문을 열지 않는 이상 구원과 동정이 나의 삶 앞에 놓여있는지 여부를 판단할 수 없다. 설령 구원과 동정이 놓여있지 않더라도 우물 밖으로 나온 개구리는 결국 세상이 궁금해지듯, 우리는 우리만의 구원과 동정을 찾아 나설 하나의 기회를 얻을 것이다. 문 밖으로 나가지 않더라도 문을 열어젖히는 것. 이 극에서는 자신의 사랑을 인정하고 내보이는 것. 자신을 사랑할 줄 아는 제니의 손은 이전과 달리 참 곱다. 그리고 이어지는 마지막 4분의 연주, 이 연주는 제니가 자신을 내보이고 지키기 위함이다. 자신이 살아있다는 반증이자 사랑하는(유성애적인 사랑이 아닌) 크뤼거와의 신뢰에 대한 보답을 표출하는 방식이기도 하다.
마지막에 내려오는 거대한 구조물, 어항처럼 보이기도, 감옥처럼 보이기도, 또는 콩쿠르의 단상처럼 보이기도 한다. 어떤 쪽이라도 상관없을 것이다. 중요한 것은 제니와 크뤼거가 자신의 문을 열어젖혔음을, 그리고 그 문 밖의 빛이 눈부시게 두 사람을 향해 쏟아졌다는 점이다.
4분, 과연 긴 시간일까? 나는 이 극의 전체에 비해서는 순간이지만 동시에 극의 전부라고 생각한다. 언제나 자신의 사랑을 고백하는 순간은 짧지만 동시에 길게 느껴지는 것처럼. 길다면 길고 짧다면 짧은 순간. 우리는 가장 솔직한 두 사람의 고백을 마주하였고 그 고백에 브라바. 라 찬사를 보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