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누군가 내 '이름'을 불러준다는 것은

그녀의 잃어버린 자아 찾기

by 호수공원

어느 경단녀의 극단적인 선택...

내가 며칠 전 읽은 김재영 작가의 ‘코끼리’라는 책 속에 단편 소설 ‘치어들의 꿈’이라는 작품의 결말이다. 2000년대 초반에 쓰인 이 소설이 주는 여운은 강렬했다.

나 역시 한때 경단녀로 지내면서 힘들었던 지난날 나의 모습...

몇 년 전 그날의 기억들이 한 장면... 한 장면 스쳐 갔다.




내가 도심에서 태어나 성인이 되어 직장에 다닐 때이다.

콩나물시루처럼 많은 사람들과 한데 뒤섞여 버스와 지하철을 타며 출근과 퇴근을 밥 먹듯 반복되는 일상은 무료한 날들의 연속이었다.

회사 일이 바빠 야근에 지친 몸으로 버스를 탔다. 깜깜한 밤이라 아침과는 사뭇 다르게 사람들이 별로 없었다. 나는 편하게 자리에 앉았다.

아무도 잡아 주지 않는 버스 손잡이는 중심 없이 흔들흔들 휘청거렸다.

나 역시도 마치 정처 없이 떠도는 나그네처럼...

인생에 있어 이십 대는 찬란한 청춘이라 하지만 메마르고 건조한 일상의 삶은 아무런 의미가 없었다.

버스에서 내렸다. 깜깜한 저 하늘은 나를 위로해 줄까?

문득 올려다본 밤하늘에는 단 하나의 별빛조차 찾기 힘든 삭막함이 느껴진 그 순간, 나는 도심에서 벗어나고 싶은 생각이 들었다.


서른이 되었다. 몇 년 후, 친구들은 저마다 짝을 지어 결혼하여 다른 삶을 꾸려 나갔다.

나는 지방에서 올라온 한 남자를 만나게 되었다. 나는 그 남자와 연애하고 좀 늦은 나이에 결혼하였다.

남편을 따라 지방 어느 소도시에서 나의 결혼생활은 시작되었다. 때론 한적하기 그지없는 그곳에서의 생활은 도심에서 벗어난 해방감과 여행을 온 듯한 약간의 설렘도 동반이 되었다.


삼십 년 이상 살아온 도심에서의 익숙함은 고즈넉한 어느 논밭의 풍경과는 분명 차이가 있었다.

빽빽한 건물 사이로 때로는 가식적인 친절과 호의가 기본으로 장착된 사람들과는 달리, 직설적인 말투와 불편한 기색을 드러내는 사람들을 보며 적잖이 당황스러울 때도 있었다.


그렇게 남편 하나 믿고 홀로 떠나온 나는 어렵사리 첫 딸아이를 임신하고 엄마가 되었다.

나의 자그마한 몸에서 그런 생명줄이 태어났다는 것에 경이로움을 느끼기도 했다.

하루가 다르게 성장하는 아이를 보살피는 것이 엄마, 혹은 ‘나’라는 사람이었다.

‘나’라는 사람이 엄마라고 머무르기에 언젠가부터 ‘나’의 존재는 늘 물음표였다.

엄마라는 한 사람 속에 ‘나’를 가만두기에 ‘나’라는 사람은 그저 작고 초라해 보였다.


딸은 하루가 다르게 성장하며 자라고 있었다. 그와 달리 엄마라는 틀 안의 제자리에서 맴돌기만 하고 있는 것 같은 ‘나’를 보았다. 내가 아닌 것 같은 낯섦이 찾아올 때쯤 생각지도 못하게 둘째 아들이 생겼다. 그렇게 나는 두 아이의 엄마가 되었다.


미어캣.jpg <미어캣 가족>

노산으로 둘째를 낳고 하루가 다르게 더욱 무거워진 몸으로 아침에 눈을 떴다.

석고처럼 가만히 굳어져 버린 몸, 꼼짝없이 침대 난간을 붙잡고 간신히 일어나니 깊은 한숨이 나왔다.

나는 첫 아이를 낳고 어지럼증으로 고생했을 무렵 찾았던 한의원이 생각이 났다.

내가 그 한의원으로 가기 전, 보통 한의원 원장님의 이미지를 떠올려 보면 KF○치킨점 문 앞에 서 있는 작은 키에 흰 양복을 입고 희끗한 수염과 풍만한 배를 자랑하는 할아버지 원장님? 나는 그런 후덕한 원장님이 있을 거라는 상상을 해 보았다. 왠지 그런 이미지가 신뢰가 갈 것 같은 느낌이었다.

내 예상과는 달리 그곳의 원장님은 큰 키의 호리호리한 체형이었다.

내가 생각했던 그런 느낌이 아니라서, 설마 하는 마음이 들었다.

그는 내가 출산 후 왜 아픈지, 진맥을 통해 내 몸을 꼼꼼히 분석하고 해박한 지식을 차분한 어조로 진중하게 설명해 주었다. 결혼을 한 후, 낯선 타지에서 차츰 적응하고 있을 때쯤 관공서나 의료 기관에서 만날 수 있는 형식적이지 않은 친절함이 신선하게 다가왔다.

그가 지어 준 약은 나의 체질에 잘 맞았고 몸을 회복할 수 있었다. 두 아이의 육아, 엄마와 늘 자석처럼 찰싹 붙어있어야 하는 둘째 아들 때문에 어깨 통증은 날 힘들게 했다.

나는 그 한의원에 가서 침을 맞고, 항상 기력이 없는 탓에 원기 보충을 위한 한약을 지어먹었다. 그렇게 나는 그가 있는 한의원에 단골이 되었다. 그는 환자들에게 온화하고 친절한 원장님이었다. 그래서인지 그는 육아의 힘듦의 고충을 누구보다 잘 알아주었다. 선배 아빠인 그는 나에게 육아에 대한 조언도 아낌없이 해 주었다.


그러던 어느 날, 큰 아이의 언어치료를 위해 센터를 가려고 아이들과 밖으로 나왔다.

아들을 유모차에 태우고 딸과 유모차를 밀며 가고 있었다. 센터 건물 앞에 큰 차가 주차되어 있었다. 건물 안으로 들어가기에 너무 좁았다. 가까스로 유모차를 밀어 넣었는데 중심을 잡을 수가 없었다. 나는 그 좁은 통로로 비집고 들어가다가 넘어져 그만 발을 심하게 삐었다.


나는 병원보다는 자주 가는 한의원에 갔다. 내 상태를 보고 그는 심각한 표정으로 바로 병원으로 가서 엑스레이를 찍어 보라고 하였다. 엑스레이를 찍어 보니 내 발등은 골절되어 있었다. 병원에서는 깁스만 해 주었다. 딱히 물리치료가 없어서 침을 맞으러 한의원에 가야 했다. 원장님은 깁스한 나를 보고, 웃음을 짓고는 이제야 안심이 된다며 힘들겠지만 기운 내라며 “파이팅!”을 해 주었다.

다른 한의원과는 달리 과잉 진료도 안 하고 나를 걱정해 주는 따스한 마음이 느껴져 훈훈한 마음이 들었다.

언니만 있는 나에게 '친정 오빠라는 사람이 있다면 이렇게 잘해주었을까?'

부모와 따로 떨어져 살고 있는 나는 문득 그런 마음이 들었다.


그렇게 시간이 지나 발등도 회복되고, 아이들을 보살피며 똑같은 일상을 보내고 있었다.

그러다 어느 날인가부터 둘째를 낳기 전 머릿속을 맴돌던


왠지 모를 모호함과 불안의 싹들이 자라고 있었다.


그것은 ‘나’라는 사람과 나의 ‘이름’을 점점 희미하게 지우려는 듯 보였다.


결혼 전, 방과 후 독서 논술 강사 일을 할 때의 일을 문득 떠올려 보았다.

코디 선생님은 날씨가 덥다며 나에게 아이스크림을 주었다. 때마침 학습 자료실에서 내가 가르치는 2학년 여자아이가 나를 보고 반기며 들어왔다. 나는 그 여자아이와 같이 아이스크림을 나누어 먹었다.

“다른 친구들한테는 말하면 안 돼. 쉿!”

우리는 비밀을 공유했다. 수업할 때 그 아이는 나와의 경험을 일기로 썼다. 아이만이 느낄 수 있는 행복함이 담긴 글을 보며 슬며시 미소가 지어졌다.


프리랜서 강사 일은 혼자 하는 일이라 사람을 만나는 게 쉽지는 않았다.

몇 년 정도 일을 하다 보니 나와 마음이 맞는 선생님을 만나게 되었다.

일주일에 한 번 가는 학교의 방과 후 수업을 마친 후, 나와 그녀는 떡볶이를 자주 먹었다. 같은 업종에서 느끼는 힘듦을 털어놓거나 때로는 여고생처럼 깔깔 웃으며 즐거움을 나누었던 일들이 떠올랐다.


각박했던 도심에서 생활이 힘들기만 했는데, 그런 소소한 즐거움은 오로지 일 적으로만 느끼는 기쁨이었다.

엄마가 누릴 수 있는 기쁨과 결이 다른 그 기쁨을 누리고 싶은 마음이 시간이 흐를수록 간절해졌다.

나는 다시 일을 시작하여 점점 희미해져 가는 나의 이름을 다시 찾고 싶어졌다.


본격적인 여름이 찾아왔다. 이곳은 내가 살았던 도심과는 차원이 달랐다.

숨이 턱 막힐 것 같은 더위로 아침에 눈을 떴다.

코로나 시국의 남편은 다니던 일을 그만두고 취업을 준비한다며 집에 틀어박혀 있었다.

뜻대로 안 되는 취업 문턱에 가장으로서 책임감이 강했던 남편은 절망했다.

그럴수록 남편의 날카로운 예민함은 나를 괴롭게 했다.

그날은 웬일인지 남편이 밖에 나가자고 했다. 더운 날씨로 지친 탓에 기운도 없고 몸 상태도 안 좋았지만

의기소침한 남편의 기분 전환을 위해 같이 나갔다.


밖은 쨍쨍 히 더운데 식당 안은 나한테만 도는 것 같은 에어컨의 냉랭한 한기가 내 몸을 감싸고 있었다.

나는 으슬으슬 추운 몸으로 덜덜 떨며 닭갈비를 대충 먹고 집에 왔다.

집에 와서 몸은 부쩍 더 안 좋아져서 나는 다시 한의원에 가서 약을 지어먹었다.


하루가 지나 몸은 서서히 회복하는 듯 보였다.

조금 회복된 몸으로 아이들이 하원하기 전 켜켜이 쌓인 설거지를 했다.

그깟 설거지 하나 했다고 내 육신은 바닥을 치고 있었다. 나는 소파에 시체처럼 맥없이 누워 있었다.

쇠약해진 몸은 작은 미동조차 허락되지 않았다.

“나 몸이 너무 아파... 꼼짝을 못 하겠어... 아이들 오면...”

소파에서 좀 떨어진 남편은 그런 나를 보며

“아프면 그냥 약 먹으면 되잖아.”

남편은 그렇게 무심한 말 한마디 툭 내뱉고는 사라졌다.

그 말 한마디가 왜 그리도 서운하고 야속한지... 서러운 마음이 들었다.


어느샌가 불안의 싹들은 눈덩이처럼 커져 내 마음을 짓누르고 있었다.


저녁이 되었다. 나는 몸을 추스르고 아이들을 가까스로 씻겼다.

막 걷기 시작한 둘째는 움직임이 많아 첫째 딸과 장난을 쳤다. 그날도 어김없이 옷도 안 입고 돌아다니기 시작했다.

“그만해!”

에어컨 바람에 감기라도 걸릴까 분주하게 아이들을 쫓아다녔다.

평소와는 다르게 분노의 감정이 순식간에 일어났다.

“그만하라니깐!!”

나는 둘째 아들에게 크게 소리를 빽 지르고 밖으로 나왔다. 아파트 주변을 돌아다니며 화난 마음을 진정시켰다. 집에 들어가니 아이들은 아무렇지 않은 듯 놀고 있었다.


“아들... 엄마가 아까 소리 질러서 미안해...”

아들을 보니 눈물이 주르륵 흘러나왔다. 아들은 그런 나를 보고

“엄마...”

하며 울음을 터뜨렸다.

나는 주저앉아 아들과 부둥켜안고 펑펑 울었다.


내 안에 묵직한 덩어리는 자꾸만 짓눌러 아프게 했다.


잠을 잘 때도 답답한 마음에 깊은 한숨이 여러 번 섞여 나와 잠을 이룰 수가 없었다.


‘너무 아파... 너무 우울해... 우울해... 누구에게 말을 해야 하나... 답답해...’


작은 주먹으로 내 가슴을 여러 번 두드려도 진정되지 않았다. 누군가를 만나 내 사정을 말하고 싶은 맘이 절박했다. 이곳에 살면서 아는 언니와 동생이 있었지만 아주 가끔 보는 사람한테 내 속얘기를 할 수는 없었다.


‘누구한테 내 마음을... 내 속마음을 얘기해야 할까? 나를 이해해 주는 사람이 있을까...?’


눈물.jpg 캄캄한 눈물...


그 마음보다 앞선 것은 아이들에 대한 미안함이었다. 걷잡을 수 없는 이런 마음으로 내가 아이들을 돌볼 수 있을까? 또 별일도 아닌 일로 아이들에게 화를 내면 어쩌지? 한 번은 아이들이 장난감 갖고 싸우길래 그 장난감을 던져 버린 적도 있었다. 왜 이렇게 분노 조절이 안 되는 걸까? 자꾸만 작아지는 나에 대한 분노의 솟구침이 나를 이렇게 만드는 걸까? 그런 생각은 나를 더 우울하게 했다.

내 얘기를 끝까지 들어줄 것 같은, 친정 오빠 같은 마음이 들었던 원장님한테 내 우울함을 상담하면 어떨까?

라는 생각으로 일어나자마자 한의원에 전화를 걸어 상담을 예약했다.

그날따라 사람이 많은 탓에 다음날 상담을 받기로 하였다.


나는 그 어떤 조언이라도 받고 싶은 마음에 아이들이 다니는 어린이집 원장님과 전화 통화를 했다.

“원장님, 저 나쁜 엄마 맞죠? 앞으로 아이들을 키우려면 저 어떻게 해야 해요?

너무 우울해서 감당이 안 될 정도라, 어떻게 해야 할지 모르겠어요.”

나는 또 주책없이 흘러내리는 눈물을 멈출 수가 없었다.

어린이집 원장님은 자신도 가면성 우울증이라며 공감하듯 나를 달래 주었다.

그렇게 진정이 되었다 싶었는데, 통화가 끝나고 난 후에도 나는 울음을 멈출 수가 없었다.

면접을 보러 간다며 남편이 나간 사이 혼자 있던 나는 집에서 훌쩍훌쩍 울기만 했다.


다음 날, 나는 그가 있는 한의원에 갔다.

“원장님, 저 우울증에 걸린 것 같아요. 전 아무것도 할 수 없어요. 몸은 약해져 축 쳐져 있고 아무것도 할 수 없는 제 자신이 너무 싫어요. 발등 골절되고 나서 괜찮아지면 하고 싶은 것들이 있었는데... 아무것도 못 하겠어요. 분노가 조절이 안 돼요. 아이들한테도 미안하고요. 저는 왜 그럴까요? 우울해서...

너무너무 힘들어요...”


괜찮아요. 그럴 수 있어요.


나를 이해하는 그의 한마디에 눈물이 나왔다. 그는 나에게 휴지를 건네주었다.

어느샌가 그의 눈가도 촉촉해졌다. 나의 슬픔을 공감하며 눈가에 눈물을 훔치는 그의 모습을 보았다.

희한하게도 단단하게 응어리졌던 마음들이 서서히 녹듯이 말랑해진 기분이 들었다.

휴지를 건네고 눈물을 훔쳤던 그의 하얗고 가느다란 손이 참으로 예뻐 보였다.

따스한 정감 어린 그의 말들도 위안이 되었다.

울화를 풀어주는 한약을 먹으니 우울함의 감정은 조금씩 흔적도 없이 사라졌다.

우울증이 잠식되어 수렁에 빠질 수도 있었던 나를 건져준 그에게 너무나도 고마운 마음이 들었다.




다시 삶의 의욕을 찾은 나는 평생 학습관에서 ‘수필’ 강의를 듣게 되었다.

수필이라는 글은 남의 일기장을 훔쳐보는 것 같아 잘 안 보았던 문학의 장르였다.

그러나 막상 공부를 하니 일상 속의 이야기를 풀어내는 그 특유의 진한 매력이 있었다.

참으로 오랜만에 글을 쓰게 되었다. 수필 강좌 선생님의 권유로 응모 전에 작품을 써서 출품하기 전, 나는 작품을 하나씩 쓸 때마다 나는 한의원에 가서 그에게 내 작품을 보여 주었다. 그럴 때마다 그는 솔직한 감상평을 나에게 전해 주기도 하였다.


막연히 예전부터 꿈꾸었던 작가의 길은 생각보다 쉽지 않았다. 입선하지 못한 작품들은 컴퓨터의 휴지통 신세가 되었다. 그래도 글을 쓰니 마음에 물렁물렁한 응어리들이 조금씩은 풀어지는 것 같았다.


그렇게 시간이 흘렀다. 남편은 원하는 회사에 취직하였다. 우리가 사는 곳에서 떨어진 다른 지방이었다.

남편과 한동안은 주말부부로 하고 우리 가족은 그곳으로 이사를 가야 했다.

그간 정들었던 그와의 헤어짐이 너무 아쉬웠다. 그는 담담하게 내가 더 좋은 곳에 가게 되었다며, 그곳에서도 잘 지내라며 격려해 주었다.

나는 그에게 내가 가장 좋아하는 책 ‘모모’를 선물해 주고, 한의원 밖을 나왔다.




이사를 오고 일 년 후쯤, 나의 지난 경력을 인정해 주는 곳에서 일을 할 수 있는 제안을 받게 되었다.

드디어 내가 그토록 바라던 내 이름을 불러주는 곳에서 일을 하게 되었다.

나는 프리랜서 강사로 일하고 있다. 일터에서 불리는 직함은 또 다른 나의 이름이다.


일을 하고 난 후, 그 후련함은 살면서 여태껏 느끼지 못한 불안의 찌꺼기를 없애 주기에 충분했다.


내가 살고 있는 이곳에서는 사람들을 제법 만나고 있다.

그들은 나에게 누구의 엄마보다 ‘언니’라고 불러주는 것이 귀엽고 친근하다.


나는 오랜만에 한약을 지으러 기차를 타고 그가 있는 한의원에 갔다.

나를 반겨주는 그는

“잘 지냈어요? 이번에 한강 작가가 노벨 문학상 수상하는 거 보고, ○○님이 생각났어요.”

S대 학사 과정 중에 듣게 된 ‘소설 창작론’ 한강 교수님의 수상 소식!!

비록 한 과목의 수업만을 듣게 되었지만, 최고의 강의를 해 준 한강 교수님 수상 소식에 괜히 들뜬 하루를 보내기도 했었다. 내가 쓴 작품들을 그에게 보여 줄 때마다 어쩌면 귀찮을지 모른다고 생각했었는데, 뜻밖에 나를 생각해 준 그의 마음에 기분 좋은 웃음이 나왔다.


‘꿈틀거리는 이 감정은 뭘까?’


나는 집으로 돌아와 컴퓨터를 켰다. 휴지통 신세였던 몇 안 되는 작품들을 샅샅이 뒤져 복원시켰다.

메일함을 열어 S대 학사를 입학할 때 제출하여 오랫동안 잠들어 있었던 작품들을 끄집어냈다.

그리고 우연히 알게 된, 작가가 되어 글을 쓸 수 있는 한 플랫폼에 내 작품들을 응모하였다.


“안녕하세요. 브런치스토리에서 호수공원으로 활동하는 작가입니다.

힘들고 지친 사람들에게 따스함과 잔잔한 위로를 전해 주는 작품을 쓰고 싶어요.

지금은 비록 무명이지만 제 작품들이 영향력이 생긴다면, 힘들고 아픈 마음의 사람들에게

자신을 치유하기 위한 글쓰기를 가르치고 싶어요.”




두 아이의 엄마이자 ‘작가’로써 다양한 시점을 고려해 볼 때, 내가 이 글을 쓴 의도와는 달리 일부 왜곡된 시선으로도 보일 수 있을까?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는 이 작품을 써야겠다고 마음먹었다.

내가 힘들고 지쳐 주저앉아 아무것도 못 하고 있을 때, 그에게서 받은 따스한 마음과 위안이 지금의 나를 일으켜주는 힘이 되었다.

나와 같은 아픔과 슬픔을 가진 누군가에게 나처럼 다시 일어설 수 있다는 용기와 위로를 보낸다.

이 글을 쓰기까지 흔쾌히 허락해 준 그에게 깊은 진심을 담아 다시 한번 감사함을 전한다.


키다리 아저씨2.jp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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