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 주의 시작을 산뜻?하게
작년 겨울이었다.
일을 마치고 집으로 향하는 버스에 올라탔다.
두꺼운 점퍼를 입은 사람들과 부대끼며 집으로 향하고 있었다.
집에 도착하는 정거장에 다다랐다. 버스에서 내렸다. 5명 남짓한 사람들과 신호를 기다리고 있었다.
한 여자가 통화를 하고 있었다. 나와는 좀 떨어져 있었다.
그 여자는 무언가 참았던 것을 토해낸 듯 욕을 한바탕 쏟아냈다.
내가 생전에 들어보지 못한 그런 거친 말이었다. 사람들의 시선은 모두 그 여자를 향하고 있었다.
그 여자는 아랑곳하지 않고 통화를 이어갔다. TV에서 조폭이 나오는 영화나, 욕을 아무렇지 않게 대화처럼
나누는 사람들의 소리가 들리면 나는 그것을 애써 피하기 마련이었다.
그러나 그때, 그 여자의 욕 한마디는 뭔가 다른, 청량함이 있었다. 적어도 나에게는.
신호를 기다리는 사람들은 무심한 듯 그녀의 통화를 엿듣는 눈치였고, 나 역시 어릴 적 즐겨 봤었던 외화에 나오는 ‘소머즈’처럼 나의 모든 청력을 끌어올렸다.
‘뚜뚜뚜뚜.’ 외화에서 들릴법한 소머즈의 신호음이 내 마음에서 들리는 듯했다.
나는 은근슬쩍 그녀를 쳐다보며 신호를 건넜다.
집으로 가는 길, 그 여자의 그 거친 말들이 귓가에 맴돌았다.
나도 예전에 그 누군가에게 욕을 퍼부었던, 그날이 문득 생각이 났다.
십여 년 전, 나는 초등학교 방과 후 강사를 하며, 야간으로 어느 예술대학에 학사과정 수업을 들으며 열심히 살고 있었다. 나와 같이 저녁에 수업을 듣는 사람들은 직장인이거나 프리랜서, 배우, 스텝, 작곡가, 등 예술에 종사하는 사람들이 꽤 있었고, 그래서인지 일반인과는 뭔가 다른 아우라를 뽐내는 사람들도 있었다.
영화를 다른 시각으로 볼 수 있게 수업을 해주는 교수님 덕분에 나는 시나리오의 매력에 빠져 시나리오 작가의 꿈을 키우며, 학교생활에 적응하고 있었다. 그러다 대중문화에 대한 ‘비평’ 수업도 듣게 되었다.
비평 수업은 예전에 문창과 수업 때부터 꽤 좋아하는 과목이었다. 당시에 나는 다른 어떤 글보다 비평을 쓰는 게 참 좋았다. 지금은 뭉툭한 연필로도 글을 쓰기도 하지만, 예전에는 연필을 뾰족하게 깎아야만 글이 잘 써지곤 했다.
비평 수업의 학기 말 기말고사 기간이었다. 교수님께서는 개별 혹은 조별로 과제를 주시고는 이것으로 시험을 대신한다고 하셨다. 나는 조별로 한다고 했다.
교수님께서는 나보다 나이가 좀 있는 언니, 나보다 두 살 어린 여자 동생, 그리고 교내에서 괴짜로 소문난 한 녀석과 조를 만들어 주었다. 교수님께서는 그 괴짜 같은 녀석이 나름의 천재성이 있을 거라며 추켜세워 주며 잘해 보라고 하셨다.
그 녀석이 썩 달갑진 않았지만, 같이 하기로 한 언니는 그 녀석의 천재성을 믿어보자고 했다.
나를 비롯한 조원들과 함께 주제를 정했다. 나를 제외한 3명은 각 주제에 따른 자료를 나에게 보내주면, 나는 그 자료를 정리하여 하나의 문서로 작업하기로 하여 제출을 하기로 하였다.
이틀 후, 나에게 가장 먼저 자료를 보내준 건 그 녀석이었다.
‘이렇게나 빨리? 어떤 자료일까?’
나는 메일함을 열었다. 나는 살다 살다 그런 자료를 처음 받아 보았다.
한글 파일이 아닌 TXT? 메모장의 자료라니, 대체 뭐지? 뭔가 싸늘한 기분에 파일을 열었다.
이런! 꼴랑 다섯 문장의 글이었다. 이걸 자료라고 보낸 거야?
그러면서 녀석은 나에게 친히 메일을 썼다.
“누나, 저 최선을 다한 거예요.”
라고, 뭐? 이게 최선이라고? 어이가 없어 헛웃음이 나왔다.
정말 단 한 문장도 쓸 수 없는 형편없는 최악의 자료였다.
나는 같이 하기로 한 언니에게 전화를 걸었다.
“언니, 어떡해요. 승현(가명)이가 자료를 보냈는데 글쎄 메모장에 다섯 문장만 보냈어요.
너무 심한 거 아니에요? 언니가 전화해서 뭐라고 혼내주면 안 돼요?”
“호수씨~(저를 지칭하는 말을 ‘호수’로 쓸게요.)
나도 남한테 싫은 소리 잘 못해. 어떡하지. 정말 승현이 너무하네.
호수씨가 학교에서 학생들도 가르치니까 학생들 대하듯 살살 달래가면서 그렇게 잘 말해 봐.”
나는 경력에서 나오는 짬으로 어느 정도 아이들을 다룰 수 있었지만, 다 큰 성인을 어떻게 다루어야 할지 막막했다. 나는 같은 조인 여동생에게도 전화를 걸었다.
동생은 학기 초 승현이가 자기한테 매일 새벽에 전화하여 괴로웠고, 승현이와의 관계가 껄끄러워 마주하기 힘들다고 하였다.
시험을 앞둔 현실에서 나에게 넌지시 조를 이끌어야 하는 책임이라는 무게가 생겼다.
이 골칫덩어리 녀석을 어찌해야 할까? 나는 깊은 한숨을 쉬고, 승현이에게 전화를 걸었다.
"너 자료 다 보낸 거 맞아? 자료가 너무 빈약해서 쓸 것이 하나도 없어. 그리고 메모장은 좀
너무하지 않아? 조별로 하는 건데, 적어도 한글 파일로 자료 모아서 보내야지. 안 그래?
다시 해서 보내줘."
"호수 누나. 저 진짜 최선을 다한 거예요. 더는 힘들어서 못 보내요. 누나가 알아서 하세요."
이성으로 부여잡은 나의 분노 버튼이 눌러지는 순간이었다.
"뭐?? 그게 최선을 다한 거라고? 너 제정신이야?"
"몰라요. 거기서 뭘 더 하라는 거예요? 정말 최선을 다한 거라서 저도 너무 힘들어요."
.
.
.
"이런!! 강아지! 시베리안허스키가 미나리풀 뜯어먹는 소리 하고 자빠졌네!!
너 진짜 죽고 싶냐? 조별로 하는 과제에서 너 혼자 날로 먹을래?
자꾸 그딴 식으로 협조 안 하면 교수님께 말해서 너 빼버린다고 말할 거야!! 알겠어?"
나는 고삐 풀린 망아지처럼 그 녀석 앞에서 날뛰었다.
나는 몹시 흥분하여 속사포 랩을 하듯 빨라진 톤으로 제법 또렷하게 말했다.
그 당시 내 모습은 마치 ‘에미넴’ 같았다.
"누나... ㅈ... 자.. 잘못했어요. 제가 어떻게 하면 돼요?"
"네가 맡기로 한 자료 한글 파일로 해서 5쪽 이상 해와! 다음 주까지!"
그렇게 우여곡절 끝에 기말고사 과제를 제출했다.
내가 녀석에게 한 참교육? 덕분이랄까? 나는 비평 수업에서 최고점을 받았다.
나는 그렇게 녀석에게 욕을 퍼부은 후, 10여 년이 지난 지금까지 적어도 면전에 두고 그 누구를 욕한 적이 없다. 남편한테는 그저 "이런 삐~"로 대신할 뿐. 엄마가 되고, 학생들을 가르치는 강사로서 언어의 선택은 늘 조심스럽고 신중할 수밖에 없다.
그때, 버스 밖에서 내뱉은 그 여자의 거친 말을 듣는 순간, 내 가슴은 막힌 하수구가 뻥 뚫린 듯 시원하고 상쾌했다. 나만 그런 건가? 괜히 피식 웃음이 나오기도 했다. 그 여자와 횡단보도를 건너면서 눈이 마주쳤다.
나는 그 여자를 향해 주먹을 움켜쥐고, 엄지손가락을 치켜세우며 '따봉'을 날려 주었다.
횡단보도에서 신호를 기다리는 사람들이 어차피 한 번 보고 마는 사람이라는 것을 그 여자는 알 것이다.
그래도 자신의 얼굴과 체면을 생각하면 말 한마디에도 가끔은 무게가 실리기 마련이다.
그 여자는 버스 안에서 꾹꾹 눌러 담았던 말들을 버스 밖에서 토하듯 뱉어냈다.
나는 그 용기가 새삼 부럽기도 하고, 신기하게 느껴졌다.
여자는 부끄러워하며 날 쳐다보았다.
그간 나에게 말로 하지 못한 가슴속, 묵힌 말들이 참 많았나 보다.
왠지 모를 대리만족을 느끼며, 서둘러 집으로 향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