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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모두의 이월 Aug 25. 2022

아무것도 아닌 여행

떠나야만 하는 이유

대학생 때 내일로 티켓을 끊어 여행을 했었다. 눈이 많이 내린 겨울이었다. 당시 전주는 날씨가 추워서인지 거리를 걷는 사람들이 많지 않았다. 발을 내디딜 때마다 뽀드득뽀드득 두툼하게 쌓인 눈덩이들이 뭉개지는 소리가 났다. 그 소리가 어쩐지 불안했다. 왜 불길한 예감은 늘 들어맞을까. 나는 길 한복판에서 꽈당 넘어지고 말았다. 당황하지 않은 척 손으로 엉망이 된 무릎이며 엉덩이를 툭툭 털었지만 화끈거리는 낯은 숨길 수 없었다. 서둘러 그 자리를 벗어났다. 그러나 얼마 가지 않아 나는 같은 행동을 반복해야 했다. 그날 은근하게 주위를 두리번거리며 다른 이들을 관찰했다. 하지만 눈길에 넘어진 사람은 오롯이 나뿐이었다. 그것도 두 번이나.


스위스의 리기산에 올랐을 때, 나만 썰매를 타듯 엉덩이로 눈길을 내려왔던 기억도 떠오른다. 유난히 눈길에 약한 내가 북유럽에 그다지 흥미가 없는 건 당연한 일이었다. 눈을 사랑하지 않고는 온전히 그곳을 즐길 수 없다고 생각했다. 


그래도 스웨덴만큼은 궁금했다. 내가 사랑하는 작가, 아스트리드 린드그렌의 나라이기 때문이다. 그녀가 어떤 풍경을 보았는지, 어떤 흔적을 그곳에 남겼는지 목도하고 싶었다. 좋아하는 작가의 나라라는 것만으로도 그 나라는 여행자에게 존재의 이유가 된다. 


캐나다 역시 그랬다. 내게 캐나다는 오랫동안 루시 모드 몽고메리의 나라, 끝에 e가 붙는 앤의 나라라는 의미만 가지고 있었다. 중학생 때 영어 선생님에게 <빨간 머리 앤>의 초록 지붕 집을 그대로 재현해 둔 곳이 캐나다에 있다고 들었다. 프린스 에드워드 아일랜드. 그 이름을 나는 꿋꿋하게 기억해두었다. 


코로나로 여행 가방을 싸지 못한 지 약 삼 년. 드디어 창고에 한동안 묵혀두었던 캐리어를 꺼냈다. 워싱턴과 뉴욕, 토론토, 프린스 에드워드 아일랜드를 거치는 37일 간의 여행을 짜면서 이 여행이 거창하고 대단하지는 않을 거라는 생각이 들었다. 마땅한 일이다. 내가 볼 감탄이 터져 나오는 그림 같은 풍경도 누군가에겐 매일 보는 일상일 테니까. 그러니 여행이란 모르는 이들의 일상으로 뛰어드는 것이다. 여행을 떠나는 게 멋있다거나 용기가 있다는 칭찬이 낯부끄러운 것은 이 때문이다. 


다른 이의 일상을 아주 잠시 가졌다가 다시 놓는 이 행위를 내가 왜 그렇게 사랑하는지 엄마와 동생은 이해하지 못했다.   

    

“꼭 가야 해? 만약 네가 외국에서 죽으면 어떡하니? 네 시체도 못 찾는 일이 생기면 어떡해.”      


엄마는 그게 걱정이었다. 으슥한 곳, 사람이 없는 곳, 위험한 곳에 가지 말아야 한다고 신신당부했다. 당연히 그럴 거라고 대답했다.      


“혹시 내가 여행을 하다 죽더라도 너무 슬퍼하지 마. 내가 좋아하는 일을 하다 죽는 거니까 행복하게 살다 죽었다고 생각하면 돼.”     


괜한 말이었다. 엄마의 걱정을 조금도 덜어주지 못했다.      


“무슨 소리야. 멀쩡하게 돌아와야지.”

“당연히 멀쩡히 돌아올 거야. 내 말은 어쨌든 하고 싶은 일을 하는 게 중요하단 거야. 나중에 후회할 일 없게.”     

최상희 작가는 <숲과 잠>에서 이런 말을 했다.

[나는 늘 여행 전이나 다녀온 직후에 대청소를 하고 싶은 충동에 시달린다. 전자는 혹 내가 여행에서 돌아오지 못했을 때를 대비해 타인에게 보이고 싶지 않은 것을 정리하고 싶다는 생각 때문이고 후자는 여행에서 돌아와서 본 내 집이 너무 많은 것으로 채워져 있다고 문득 깨닫기 때문이다. 하지만 대청소는 늘 실패한다.]  


여행을 떠나면서 나는 언제나 가족과 친구들에게 안전하게 돌아올 것을 장담하고서 떠난다. 그렇지 못할 수 있음을 알면서도. 돌아오지 못할 것을 대비해 대청소를 한 적은 없었지만, 정말 돌아오지 못할까 봐 대청소를 하고 갈 마음도 아직까지는 없지만 여행을 떠날 때 내 안에서는 혼자만의 작별인사가 시작된다. 죽음을 각오할 만큼 여행을 열렬히 사랑한다는 거창한 이유보다는 여행을 하면서 이전의 나보다 조금 더 나아진 내가 되기를 바라는 마음으로.

  

그럼에도 불구하고, 내 여행은 아무것도 아닐 것이다. 오롯이 나만이 경험하는 각별한 이야기들은 존재하지 않을 것이다. 누군가가 본 광경에 내 시야를 더하고, 누군가가 남긴 발자취를 이어 나가는 것에 그칠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는 떠나기로 했다. 

떠나야만 만날 수 있는 세상이 있다. 그건 때때로 과거가 되고, 미래가 된다. 나의 현재는 시간 여행을 통해 다시 만들어진다. 어떤 '나'가 될 것인가의 궁금증을 안고, 나는 곧 떠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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