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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월 Oct 05. 2017

L36END 이승엽

#영원히 추억할 국민타자 그리고 나의 순간들

이승엽 선수를 모르는 사람이 대한민국에 몇이나 될까? 그를 모르는 국민은 아마도 없을 것 같다. 그가 쳤던 홈런은 많은 이들에게 기쁨이었고 선물이었을 것이다. 내게도 그러했다. 국민타자 "이승엽" 그 이름 석자는 내게 아주 특별한 존재다.


아빠와 승엽이

야구를 사랑했던 아빠는 어린 시절부터 그 이름을 귀에 딱지가 앉도록 불렀다. 딸 이름보다 더 자주 불렀을 '승엽이'였다. "오늘 승엽이 또 홈런 쳤다."는 말을 수도 없이 들었다. 이승엽 선수가 56번째 홈런을 치던 순간에는 잠자리채를 들고 일찌감치 야구장에 자리 잡고 있던 아빠였다. 일본에서 뛸 시절에는 하루도 빠짐없이 일본 야구중계를 챙겨봤고 알지도 못할 일본 야구 구단과 선수 이름을 신이 나서 설명하던 아빠의 모습이 떠오른다. 당시 아빠는 딸 등수는 몰랐어도 이승엽 선수가 친 홈런 개수는 어느 경기에서 어떻게 쳤는지 훤히 꿰뚫었다. 


아빠는 '이승엽'이라는 이름과 함께 30대, 40대, 50대를 보냈다. 아빠는 그와 함께 울고 웃었다. 우리 집이 경제적으로 힘들었던 시절, 나는 늘 야구를 보고 있던 아빠가 이해가 가질 않았다. '저 사람이 홈런 치는 게 우리랑 무슨 상관이 있다고 저렇게 좋아하지?'라는 의문이 들었다. 그 당시에는 이승엽 선수가 홈런을 친다고 기뻐하던 아빠가 답답하게 느껴지기까지 했다. 그러나 시간이 지나고 내가 어른이 되면서 조금씩 아빠를 이해할 수 있게 됐다. 힘들었던 아빠의 나날들에 그는 희망이었으리라.. 그가 슬럼프를 이겨내고 쏘아 올렸을 홈런은 아빠에게 용기가 되었을 것이고 그가 기쁨에 그라운드를 도는 모습은 아빠에게 위안이었을 것이다. 아빠는 그에게서 희망을 봤으며 그런 그를 아끼고 사랑했고 또 존경했을 것이다. 


사회인 야구단에서 뛸 당시에 중학생이던 이승엽 선수를 만나 조언을 해줬다는 아빠의 말은 허풍인 것 같지만.. 팬으로서 이승엽을 사랑하는 아빠의 마음은 허풍이 아니다. 아빠는 승리의 기쁨과 패배의 아쉬움 그리고 기쁨을 만끽하는 법과 슬픔을 이겨내고 다시 일어나는 법을 야구를 통해 가르쳐줬다. 그리고 그 가운데는 이승엽 선수가 있었다. 나는 그가 기뻐하고 아쉬워하는 모습에서 많은 것을 배웠다. 그는 아빠가 야구를 통해 알려주던 세상의 훌륭한 교과서 같은 존재였다. 


야구장에서 만난 라이언킹

내가 야구장을 가게 된 가장 큰 이유는 이승엽 선수였다. 아빠랑 동생이랑 야구장을 자주 갔었다. 우리가 야구장을 찾을 때면 응원석도 야구가 아주 잘 보이는 자리도 아닌 외야석에만 앉았다. 단지 이승엽 선수 홈런볼을 줍고 싶은 아빠의 바람 때문이었다. 외야면 어떤가.. 신나게 응원도 하고 치킨도 뜯고.. 즐거웠다. 아빠랑 동생이랑 그렇게 시간을 보내고 있는 게 좋았다. 친구랑도 야구장을 찾았다. 매번 "치맥 ㄱ?" "승짱 보러가자!"하며 친구를 끌고 갔다. 가족들이랑 갈 때와는 또 다른 즐거움이 있었다. 


작년에 삼성 라이온즈가 구장을 라이온즈 파크로 옮겼다. 우리 집에서 아주 가까운 곳으로 옮겼음에도 불구하고 야구장을 딱 한 번밖에 가지 못했었다. 반면에 올해는 야구장에서 살다시피 했다. 표를 예매해서도 가고 집에서 야구를 보다가도 8회부터 무료입장으로 야구를 보러 가기도 했다. 야구장에서 선수들 이름을 부르며 응원하고 노래 부르면서 춤도 추고.. 그냥 그 순간이 너무 소중하고 즐거웠다. 나의 젊은 날의 순간을 함성과 열정으로 채우고 싶은 마음이었다. 더해서 이승엽 선수가 은퇴를 하고 내가 찾는 야구장에 그가 없음이 실감이 나지 않을 것만 같아서.. 당연히 야구장에 있을 것만 같은 선수를 떠나보내고 싶지 않은 마음이었다. 그가 그라운드를 떠나는 것이 너무 아쉬웠다.


그런 아쉬움 탓이었을까? 내가 야구장을 찾을 때마다 이승엽 선수가 자주 홈런을 쳤다. 홈런은 야구의 꽃이라던 아빠의 말처럼 지고 있던 순간에 터진 이승엽 선수의 홈런은 우리를 열광하게 만들었다. 수도 없이 쳤을 홈런이지만 내 눈앞에서 보는 홈런은 또 다른 의미로 다가왔다. 힘들었던 내게 야구장에서의 시간은 휴식이었다. 비록 삼성이 9위라는 성적표를 받았지만 등수는 아무런 상관이 없었다. 그곳에서 함께했던 사람들과 그 순간의 환호 그리고 함성소리만이 추억의 한 장을 채우고 있을 뿐이다.  


국민타자 이승엽

이승엽 선수는 국민이라는 수식어가 붙은 유일한 타자다. 그가 국제 대회에서 국가대표로서 보여준 모습이 많은 이들에게 얼마나 강렬한 기억으로 남아있는지 확인할 수 있는 대목이다. 내가 기억하는 여러 순간 중에서 가장 기억에 남는 순간은 2008년 8월 22일, 2008 베이징 올림픽 한국 vs 일본 야구 준결승전 중에서 이승엽이 친 역전 홈런이었다. 


2:2 동점 상황, 8회 말 터진 이승엽 선수의 2점짜리 홈런은 한국의 승리를 결정지었다. 

왜 그가 국민타자인지 또 슈퍼스타인지 확인할 수 있었던 순간이었다. 셀 수 없는 기록을 가진 그지만.. 내게는 올림픽 때 모습이 국민타자라는 그 이름과 가장 잘 어울리는 모습이다.


국민타자가 되기까지의 무한히 기울였을 이승엽 선수의 노력이 가늠조차 되지 않는다. 다만 그의 말처럼 혼을 담은 매우 특별한 노력을 무한히 기울였음을 짐작할 뿐이다. 국민타자라는 왕관의 무게를 멋지게 견뎌낸 그가 존경스럽다. 


앞으로 이승엽과 같은 선수를 또 만날 수 있을까? 그렇다면 큰 행운이겠지만.. 그렇지 않다 하더라도 괜찮다. 나는 이승엽 선수와 같은 시대를 살았고 그의 경기에 한호 할 수 있었음에 감사할 따름이다. 

  


은퇴 경기

이승엽 선수의 은퇴경기를 예매했다. 내게 큰 의미를 가진 선수가 떠나는 순간을 함께하고 싶었다. 응원도, 격려도, 감사도 모두 보내고 싶었다. 


"연타석 홈런" 전설의 마지막 경기에서 최고라는 수식어 말고 다른 수식어를 찾을 수 없었다. 최종전 승리와 함께 시작된 그의 은퇴식을 바라보는 마음은 뭐라 형용할 수 없는 복합적인 마음이었다. 고마움과 아쉬움이 공존했다. 그를 지켜보는 아빠의 마음이 얼마나 서운하고 섭섭할까? 아빠에게 그리고 내게 희망이었을 선수를 떠나보내는 것은 아쉽고 아쉬운 일이었다. 집이 아닌 야구장에서 그 순간을 지켜보고 있음이 무척이나 다행이었다. 


눈물을 흘리던 그의 모습에서 나 역시 눈물이 났다. 모두가 "이승엽"을 연호했다. 그의 응원가도 함께 불렀다. "아아아 이승엽 삼성에 이승엽~ 아아아 이승엽 전설이 되어라~" 평생 잊지 못할 그의 응원가가 마지막으로 울려 퍼졌다. 


이미 전설이 된 이승엽 선수는 선수로서 유니폼을 벗었지만, 국민타자로 많은 이들의 가슴에 영원히 기억될 것이다. 


그라운드에 015B의 "이젠 안녕"이 흘러나왔다. 그를 보내는 우리의 마음이 고스란히 담긴 가사. "이제는 우리가 서로 떠나가야 할 시간. 아쉬움을 남긴 채 돌아서지만, 시간은 우리를 다시 만나게 해 주겠지 
우리 그때까지 아쉽지만 기다려봐요." "안녕은 영원한 헤어짐은 아니겠지요. 다시 만나기 위한 약속일 거야. 함께했던 시간은 이젠 추억으로 남기고 
서로 가야 할 길 찾아서 떠나야 해요."


이승엽 선수는 분명 우리 곁으로 돌아올 것이다. 새로운 모습으로 돌아올 그를 기다려본다.. 


사랑합니다. 고맙습니다. 영원히 기억하겠습니다.

이미지 출처 

:http://news.donga.com/3/all/20031002/7987875/1

:구글 이미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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