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홀로 마흔번째 생일
언제 나이만 먹었을까. 스물아홉에서 서른이 되었을 때는 겁이 났다. 부모님에게 기대기엔 이미 어른이 되었는데, 나는 여전히 미성숙했으니까. 지금이라고 크게 다르진 않다. 평생의 업은 아직도 못 찾았고, 결혼도 못했다. 이번 생은 이미 틀렸나.
하지만 서른아홉에서 마흔이 되던 날에는 이상하리만치 평온했다. 십 년 전, 불현듯 찾아온 자괴감은 더 이상 없다. 오히려 별 탈 없이 살아온 나 자신을 칭찬하고 싶었다. 나의, 나 자신에 의한, 나 자신을 위한 마흔번째 생일 기념 여행.
묵언
어디로 가볼까. 숙소만 모은 메모장을 열었다. 이 중에서 가장 시선을 끌었던 건 [묵언]. 나 홀로 여행자를 위한 숙소라는 것도, 사운드 체험이 제공되는 것도 마음에 들었다. 위치는 전라남도 보성이었다. 한 번도 안 가본 동네라니, 어쩐지 더 설레는 걸.
숙소는 아기자기했다.
우선 문 앞에는 내 팔 길이 만한 불상이 있었다. 위에는 차크라 색상을 담은 가랜드가, 아래는 작은 물줄기가 흘렀다. 발리에서 볼법한 풍경이었다.
안에는 침대와 책상뿐이었다. 단순했지만, 포근했다. 책상에는 책 몇 권, 방명록 노트, 손바닥 만한 싱잉볼이 있었다.
일어나자마자 따뜻한 차부터 마셨다.
커튼을 걷으니, 새 집처럼 생긴 무엇이 보였다.
저건 어디에 쓰는 걸까.
한 명만 들어갈 수 있는 명상 존이자나.
유레카.
당장 문을 열고 나갔다.
풍경 소리가 나를 반겨 주었다.
안에 있는 방석을 깔고, 그 위에 아빠 다리 자세로 앉아 보았다. 눈을 살포시 감고, 생각을 하나씩 지워 나갔다. 살갗에 바람이 앉았다. 새소리는 멜로디처럼 들렸다. 꽃이 햇살을 받으면 좋아하듯, 내 에너지도 한결 더 올라갔다. 인생 뭐 있겠어, 이런 사소한 순간을 하나씩 수집해 보는 거지.
숙소 주변에는 끝없는 논밭이 펼쳐져 있었다. 거리에 보이는 사람은 전부 다 할머니 할아버지였다. 찐 시골이었다.
우연히 참기름도 직접 짜내는 떡집을 찾았다. 동네 사람들이 와서 박스채로 사갔다. 나도 쑥떡을 살 수 있는지 물어보았다. “그럼, 한 장 줄까? 아가씨 예쁘게 생겼네. 손녀딸 같아서 뭐라도 챙겨주고 싶어.”라고 수다를 쏟아냈다. 그런데 카드 계산기가 없단다. 주머니에서 현금을 주섬주섬 꺼냈다.
다시 숙소에 돌아왔다. 햇살이 좋았다. 가져온 책을 집어 들고, 마당에 나갔다. 드러눕고 싶긴 했지만, 얼굴이 새까맣게 탈 것 같았다. 일단 방 앞 캠핑 의자에 앉았다. 천천히 책장을 넘겼다. 갑자기 고양이가 종아리에 얼굴을 비비기 시작했다. 모든 것이 완벽한 생일이었다. 역시 내려오길 잘했다.
저녁이 되었다. 가로등이 거의 없어서 그런지 금세 깜깜해졌다. 내일은 뭐 하지. 몇 시간을 걸려 여기까지 내려왔는데, 바로 올라가기에는 아쉬웠다. 어디라도 가봐야겠어. 주변 사찰을 검색했다.
이왕 온 김에 하루만 더
가장 가까워 보이는 곳은 바로 대원사. 이왕 이렇게 된 거, 템플스테이까지 예약했다. 주변에 적당한 숙소가 없으면, 사찰에서 자기 — 나만의 여행 방식이다. 문제는 교통편이었다. 지방 버스는 배차 시간이 길기 때문에, 정확한 시간에 대기하는 게 중요했다. 네이버에서 열심히 정보를 검색했다. 그렇게 찾아낸 첫 차는 오전 9시 20분. 숙소에서 8시 즈음에 나가야 하는구나. 우선 자야겠다.
* 다음 주에는 대원사 여행기를 기다려 주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