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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용한 사찰에 간 줄 알았는데, 스님이 유재석

by 은손


지금은 대원사입니다

구불구불한 천봉산 산길을 얼마나 달렸을까. 마침내 보성 대원사 정류장에 내렸다. 저 건물은 뭐지? 자그마한 원통 수십 개, 황금빛 뿔을 단 탑 네 개, 꼭대기에 살짝 드러난 사찰 지붕까지, 아무래도 여기가 네이버에서 봤던 티베트 박물관인 것 같다. 당장이라도 구경하고 싶지만, 양손에 든 짐이 무거워 도무지 발이 떨어지지 않는다. 일단 짐부터 맡기고 와야겠다.


일주문부터 첫 번째 법당까지 야자 매트가 길게 깔려 있었다. 발바닥이 닿을 때마다 부드러운 감촉이 온몸에 스며들었다. 좋은 운동화를 신어야 발이 편하다고 하는데, 쿠션만 있어도 편했다. 양옆에 늘어선 나무 덕분일까, 마치 레드카펫 위를 행진하는 기분이 들었다. 물론 지금은 겨울이라 매우 앙상하다. 하지만 봄에는 이 길에도 꽃이 피겠지. 그때는 또 얼마나 아름다울까. 낯선 공간에 왔다는 긴장감이 다 녹아내렸다.


종무소 앞에 다다랐다. 안에서는 누군가 바삐 일하고 있었다. 문을 어떻게 두드릴까. 너무 세면 놀랄 것 같고, 너무 약하면 내가 온 줄도 모를 것 같다. 에라이. 주먹을 가볍게 쥐고 두세 번 두드린 뒤, 조심스레 문을 열었다.





이상한 나라의 템플스테이

ChatGPT

“대원사 템플스테이 신청한 사람인데요.”

“1박 신청하신 분이세요?

이렇게까지 일찍 온 분은 여태껏 처음이에요.”

입실 시간은 2시 30분인데, 내가 도착한 시간은 11시.

일찍 와도 너무 일찍 온 셈이다.

스님 얼굴에 당황한 기색이 역력했다.


“일단 앉으세요.

저는 보성 대원사의 재정이라고 해요.

재정 스님이라고 불러 주세요.“


Pixabay

그녀는 이내 녹차 한 잔을 내려 주었다. 차를 사이에 두고 마주 앉으니, 자연스레 대화가 시작되었다. 어쩌다 이곳에 오게 되었는지, 사찰에 와본 적 있는지, 요즘 가장 많이 하는 생각은 무엇인지. 그 순간, 마음에 켜켜이 쌓여 있었던 이야기가 물밀듯 쏟아져 나왔다. 가만히 고개를 끄덕였던 스님. 그녀는 정답을 알려주는 대신, 자신이 인생의 고비를 어떻게 헤쳐 나왔는지 덤덤하게 들려주었다. 그리고 말했다, 나 역시 나만의 정답을 찾아낼 수 있을 거라고. 나보다 나를 더 믿어주는 듯한 눈빛에 눈물이 쏟아질 뻔했다.


어느새 공양 시간이 다 되었다. 다른 템플스테이에서는 묵언이 원칙인데, 이곳은 달랐다. 모두가 환한 얼굴로 도란도란 이야기를 나누고 있었으니까. 며칠 먼저 입실했다는 모녀는 이것저것 알려주었다. 처음 본 사이인데도 이상하게 의지가 되었다. 마치 동지가 생긴 기분이었다. 그들은 일주일이나 더 머문다고 했다.


스님은 총 네 분 — 주지 스님, 재정 스님, 네팔에서 온 두 분. 공양간도 네팔 아주머니가 총괄하고 있었다. 처음에는 한국 음식이 낯설어 애를 먹었다고 했지만, 지금은 당장 식당을 차려도 될 솜씨다. 소식좌로 유명한 내가, 이곳에서는 얼마나 먹었는지 모른다. 심지어 오늘 퇴실하는 손님은 가지무침 레시피를 적어갔다. 저녁이 한참 남았는데, 벌써부터 침이 고인다.


밥을 다 먹고 일어서려던 찰나, 누군가가 나를 불렀다.

“차 한 잔 마시고 가야지.“

처음 보는 얼굴이었다.


혹시 이상한 사람은 아니겠지? 어리둥절한 표정을 본 모녀가 웃으며 말했다 — “괜찮아요. 여기에서는 식사가 끝나면 다 같이 차를 마시거든요. 일단 따라와요.” 그제야 안도의 한숨이 나왔다. 공양간 한편엔 다완이 가지런히 놓여 있었고, 나는 그중에서 노란색 바탕에 화려한 꽃무늬가 그려진 잔을 골랐다.


“마시고 싶은 차 한 번 마음대로 골라봐.”


이번엔 나를 초대한 어르신이 말했다. 그는 보성 대원사의 주지, 현정 스님이었다. 무슨 이야기를 하면서 차를 마셔야 할지 걱정되었다. 하지만 이 모든 것은 기우였다. 스님이 유재석에 버금가는 입담꾼이었기 때문이다. 정치, 역사, 문학까지, 척척박사가 따로 없었다. 만해 한용운의 시를 읊는 모습에 깜짝 놀랐다. “그만 읽으셔도 되는데.. “라고 말하지 않았다면 끝까지 낭송했으리라. 불교 철학도 어찌나 재미있게 설명해 주는지, 별 관심이 없었던 나조차 빠져들었다. “어떻게 이렇게 아는 게 많으세요?”라고 물으니, 스님이 능청스럽게 대답했다. — “다 널 위해서 준비했지.”





난 사랑에 빠졌죠


Pixabay

재정 스님에 주지 스님, 템플스테이 동지까지 —

입실하기 전에 전부 인사를 나누었다.

템플스테이 경험이 괜찮을지 걱정했는데,

벌써 만족, 대만족이다.

공양간을 나와서 방으로 돌아가는 길, 문득 생각했다.

대원사와 사랑에 빠진 것 같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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