뿌리 깊은 나무
2011년에 방영된 드라마를 이제야 보았다. 순전히 넷플릭스 덕분이었다. 사극을 좋아하는 사람에게 세종의 이야기를 추천하면 누르지 않을 수 없으니까. 그렇게 연말에 시작한 [뿌리 깊은 나무] — 아무 생각 없이 보면서 휴식을 취하려 했는데, 오히려 2026년을 힘차게 시작할 이유를 만들어 주었다.
이 드라마는 각기 다른 신념을 가진 조직의 대결로 전개된다. 한글 창제를 준비하는 세종과 이를 저지하는 가상의 비밀 조직 밀본이 주인공이다. 처음에는 주연 배우의 연기에 이끌려 보기 시작했다. 한석규가 연기한 세종대왕의 절제된 카리스마, 장혁의 채윤이 보여주는 복수심과 성장, 그리고 윤제문이 연기한 밀본의 수장 — 정기준의 비장함까지. 한글이 퍼지는 걸 막기 위해서 온갖 계략을 마다하지 않는 정기준이 당연히 악역이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회가 거듭할수록 선과 악의 경계가 흐릿했다. 각자가 믿는 세상을 위해서 싸울 뿐이었다.
세종대왕은 신분을 막론하고 스스로 옳고 그름을 생각하기 위해서 누구나 읽을 수 있어야 한다고 믿는다. 밀본의 수장 정기준은 백성이 글자를 배우면 양반이 복잡한 규제로 힘없는 백성을 옭아맬 수 있다고 본다. 밀본의 또 다른 구성원 심정수는 권력 구조에 더 관심이 있다. 왕은 상징적인 존재로 남고 국정은 재상이 담당하는 재상총제재를 실현하기 위해서 목숨을 건다. 세종의 아버지 태종이 피로 얼룩진 왕권 강화를 이룬 시대를 목격한 그에게, 재상총제재는 유혈 사태를 막는 유일한 방법이었다.
결말은 우리가 알고 있는 역사와 다르지 않다. 세종대왕은 이 모든 방해 공작을 넘어, 한글 반포에 성공한다. 하지만 내가 본 [뿌리 깊은 나무] 드라마는 한글 창제의 성공담이 아니다. 이 작품은 신념을 가진 사람들이 얼마나 잔인해질 수 있고, 또 얼마나 숭고해질 수 있는지를 끝까지 보여준다.
백성을 지키기 위해서 한글 반포를 끝까지 막으려는 정기준. 그는 밀본 대표 자리를 권정수에게 넘겨주는 대신에 한글 반포를 막아낼 중요한 정보를 받아낸다. 그리고 극 중 신세경이 연기한 궁녀 소이가 한글 창제의 핵심 인물임을 알아챈 순간, 그는 독화살을 쏘라는 명령을 내렸다. 그녀는 피하지 못했다. 그러나 죽어가면서도 자신의 치마를 찢고 또 찢어서 훈민정음의 사용설명서인 해례를 기록한다. 해례를 전부 기억하고 있었던 유일한 사람이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죽는 순간까지 자신의 역할을 다했다. 인생의 명확한 북극성이 없어서 계속 방황하던 나에게 그들의 모습은 귀감이 되어 주었다.
그래서였을까, 시청이 끝난 뒤에도 드라마 하이라이트가 오랫동안 머릿속에 맴돌았다. 나는 [뿌리 깊은 나무] 주인공이 그랬던 것처럼 꼭 이루고 싶은 꿈이 있는가. 그것은 세상을 이롭게 만드는 일인가. 그 꿈을 위해서 어느 정도까지 노력할 수 있는가. 내게 남은 건 한글의 위대함이 아니라, 내가 이루고 싶은 것이 무엇인지, 그것을 위해서 얼마나 멀리 갈 수 있는지에 대한 질문이다.
마침 연휴 동안 향후 10년의 인생 지도를 그리기 위해서 나만의 리트릿을 다녀올 계획이었다. 그 기간에 생각할 거리가 필요했는데, 드라마 덕분에 세 가지 질문을 얻었다. 일상에 복귀하게 될 즈음에는 당당히 답할 수 있기를 바라며, 슬슬 떠날 채비를 시작해 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