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사 생활을 시작하다
어제, 2019년 4월 9일, 박사과정을 진행하러 스웨덴 린셰핑에 도착했다.
내가 앞으로 묵을 방 주인이 밤늦게나 되어야 집에 돌아온다고 하여, 하는 수 없이 린셰핑에 있는 친구네 내가 가지고 온 캐리어를 놔두고, 학교를 갔었다.
사실 공식적으로 박사를 언제부터 한다 이런 구체적인 얘기가 오간 적이 없기 때문에 나는 그냥 린셰핑에 도착했으니까 인사나 한번 해야지... 란 생각으로 학교에 간 느낌이 컸다. 그러나, 교수님은 생각이 좀 달랐나 보다. 아니 똑같은 생각을 하고 있었으나 상황이 좀 특별했었는지도 모른다. 내가 학교 교수님 사무실에 도착해서 인사를 드리고 악수 한번 하자마자 지금 진행하고 있는 Paper에 대해 이야기를 하기 시작했다.
어라? 이게 아닌데? 나는 이런 얘기를 하려고 온 게 아니었는데... 란 생각이 들면서 그냥 천천히 듣기 시작했는데, 예테보리 대학에서 프로젝트를 진행하던 중 내 논문을 읽게 되었고, 그 대학에서 진행한 것보다 내 실험 결과가 더 좋게 나온 것을 보고 프로젝트의 일부를 우리에게 의뢰를 한 것이다. 물론, 완전 동일한 것은 아니고, 각종 조건들이 달랐다. 그래서, 그 조건에 맞춰서 다시 실험을 하는 게 주 업무였는데, 조건을 바꾸다 보니 새로운 문제점이 생겼고, 더 발전시킬 수 있는 방법도 새롭게 생겨난 것이었다.
나는 그동안 한국에 있었으니까 당연히 그 프로젝트를 담당할 수 없었고, Paper 제출기한이 촉박하여 교수님이 나를 대신하여 진행을 하고 있었다. 근데 아무리 내 프로젝트를 잘 알고 있다고 하더라도 본인이 직접 진행한 것이 아니기에 문제점이 생겼고, 나를 보자마자 그 문제점을 공유하고 싶었던 것 같았다.
그런 사정으로 인해 혹시 아직 박사를 시작한 것은 아니지만 미리 업무를 시작해서 나중에 그 일한 만큼 휴가를 간다던지 하는 방식으로 먼저 시작하는 건 어떠겠냐는 식으로 얘기를 하셨다. 물론 강요는 아니고, 부담이 되면 하지 않아도 된다는 식으로 말했지만, 난 딱히 할 일도 없다고 생각해서 그냥 가벼운 마음으로 하겠다고 했다. 사실 내가 한 논문은 끝까지 내가 맡아서 하는 게 좋을 것 같다는 생각도 있었다.
그렇게 비공식적으로 1일 차가 되는 날, 바로 후회가 되었다. 아 조금만 더 쉴걸...
방 주인은 저녁 9시에 시간이 된다고 했지만, 다시 연락을 해보니 9시는 무리고 10시나 되어야 집에 도착한다고 했다. 그래서 밤늦게 엄청난 양의 짐을 싣고 10시 넘어서 집에 도착을 했는데, 짐을 풀고 이것저것 설명도 좀 듣고, 정리를 하다 보니 진짜 엄청난 피로가 몰려왔다. 그래도 아무렇게나 잘 수 없어서 적당히 씻고 정리하다 보니 1시가 되고 온 몸이 쑤셔왔다. 내 인생에서 진짜 손까딱할 힘도 없다는 표현이 어울리는 순간이 또 있을까 싶었다.
그리고 아침에 보자고 얘기를 했으니, 또 늦으면 혹시나 첫인상이 안 좋아질까 봐 8시까지 학교에 출근을 했고, 가자마자 사무실 열쇠를 받으면서 업무(?)가 시작되었다.
사무실은 일단 개인 사무실을 받기는 힘들다고, 내가 예전에 논문 쓸 때 사용했던 곳, 똑같은 자리에서 임시로 시작하게 되었다. 그리고 문제점에 대해 열심히 교수님이 설명하기 시작하는데...
나에게 온 것은 멘붕뿐이고, 내가 한국에서 너무 놀았나 이거 내가 했던 거 맞나 진짜 하나도 모르겠다. 무슨 소리 하는지도 모르겠고, 뭘 해야 할지도 모르겠고 그냥 설명해주는 거 고개를 끄떡이면서 미소만 지었다.
하하하하하
교수님도 나의 표정을 읽으셨는지, 나를 이해시키기 위해서 더 열심히 설명을 하시는 도중에! 우연찮게 코드 안에서 실수를 발견하셨고, 그걸 고치니까 여태까지 고민했던 문제점이 싹 해결되었다. 교수님이 엄청나게 기뻐하면서 내가 이 문제를 가지고 어제 하루 종일 머리 싸매면서 고민했는데 남한테 설명하니까 문제점을 발견할 수 있었다고 나한테 고맙다고 한다.
아 네... 그렇군요.
그렇게 문제점 하나가 해결이 되었으니, 이제 다음 문제점을 향해 나아갈 시간으로 또 열심히 설명을 해주신다. 하하하 젠장... 아까 그 문제도 뭐였는지 모르겠다고요...
그래서 일단 코드를 분석하고 있겠노라고 말씀을 드리고, 문제점에 대해선 차차 생각을 해보겠다고 말을 하고 공부를 시작했다. 하루 종일 그렇게 모니터에 적힌 외계어들을 분석하는 시간을 가지게 되었다.
그러다가 두 번째 멘붕의 시간이 왔는데, 그건 바로 FIKA 타임. 으악...
사실 fika는 부담 없이 커피 한잔 하는 시간이었지만, 여기서는 공식적으로 매주 수요일에 다 같이 fika를 한다고 한다. 그래서 영문도 모른 체, 교수님 손에 이끌려 자리에 가니 모두가, 한결같이, 스웨덴 어를 하고 있었다. 그리고 나는 그 자리에서 뻘쭘하게 커피만 홀짝 거리고 있었다.
나한테 몇 명이 어디서 왔냐 무슨 공부할 예정이냐 질문을 하기도 했는데, 너무 긴장한 나머지 영어가 잘 나오지도 않고, 잘 알아듣지도 못해서 횡설수설해버렸다. 그러고 나니 자기들끼리 스웨덴어로 잡담을 나누면서 웃고 떠드는데 나는 바로 소외되어 버렸다. ㅠㅠ 앞으로 꾸준히 볼 사람들인데 첫인상이...
그리고 다시 업무로 돌아가서 열심히 공부를 하다가 내가 드디어 좀 알 것 같아서 교수님께 신나게 찾아가 말을 해봤는데, 교수님은 혼자서 이미 거의 마무리 단계까지 진행을 하였고, 내가 하고 있는 말은 너무나 당연한 말들 뿐이었고, 다른 일이 더 생겼을 뿐이었다. 아... 나 오늘 하루 종일 뭐한 거지...
그래서 교수님은 이제 공식적으로 언제 박사를 시작할지 어디서부터 시작할지에 대해 다시 얘기를 해보자고 다음에 보자고 하고 하루가 끝이 났다. 그리고 집에 도착해서 이 글을 쓰고 있다.
사실 박사가 쉬운 것도 아니고, 처음이니까 아무것도 모르는 게 당연하겠지라고 나에게 자기 최면을 걸고 있었지만 자존감이 바닥을 향해 곤두박질치고 있었다. 그냥 한국에서 취업자리나 알아볼걸 괜히 이 먼 곳에 박사를 하러 왔나... 많은 생각이 들었다. 아직 방도 다 안 치웠고, 집은 다른 사람들하고 셰어 하느라 화장실 가는 것도 신경 쓰이고, 방음은 전혀 안돼서 옆방 통화 상대방 소리가 들릴 정도고 으아아아
이제 막 시작인데 너무 힘든 것 같다. 그냥 박사 좀 천천히 시작한다고 하고, 제대로 된 집이나 잘 구하고 정착하는데 더 신경을 쓸걸 그랬나 싶다. 여러모로 걱정이 많이 되는 하루이다.
내일은 좀 더 밝은 하루가 되길...
* 앞으로 박사과정에 대한 공개 일기(?)를 생각날 때마다 써볼까 한다. 현재의 내 감정을 기록해놓고 싶기도 하고, 스웨덴에서 하는 박사가 실제로 어떻게 되나 현실감 있게 공유를 하는 것도 나름 의미가 있다고 생각한다. 매일매일 쓰진 않겠지만, 그래도 보는 사람이 있다면 도움이 되기를 ㅎㅎ