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사를 향한 한걸음 더
Better than yesterday
어렸을 때부터, 장래희망을 묻는 질문에 나는 답을 잘하지 못했다. 당장 내일 내가 무슨 일을 할지도 모르는데, 몇 년 혹은 몇십 년 뒤에 무슨 일을 할지 어떻게 알까? 그래서 어렸을 때 내 장래희망은 선생님, 프로그래머, 혹은 공무원이나 심지어 카지노 딜러까지 매일같이 바뀌었었다. 취준생일 때도 10년 후의 내 모습을 묻는 질문들이 있었는데, 회사를 이끌어가는 중견급 인재가 되어있을 거라는 손발이 오그라드는 대답을 했었지만, 내가 지금 여기에 있을 거라는 걸 그 당시에 예상이나 할 수 있었을까? 그저 난 그렇게 미래를 보기 보단 그냥 한걸음 더, 어제보다 나아가는 걸 목표로 살뿐이다.
스웨덴 린셰핑에서 박사 생활을 시작한 지 이제 한 달이 되어간다. 어느 정도 익숙해질 만 하기도 한데, 아직도 내가 여기서 뭘 하는지 감이 잘 안 온다. 한 달이면 길지도, 짧지도 않은 기간인데 여태까지 내가 한 일은 사실상 아무것도 없는 것 같고, 뭔가 컴퓨터로 끄적이곤 있지만, 항상 부족한 느낌이다. 뭔가 더 해야 할 것 같은데 뭘 해야 할지 모르겠어서 불안하다.
뭐 아무튼, 그래도 한 달이 된 만큼 도착한 뒤에 한 여러 가지 일에 대해 얘기해보고자 한다. 각종 등록과정과 내가 어떤 분야에서 공부를 하게 되고, 앞으로의 계획은 어떻게 되는지 공유해보도록 하겠다.
처음에 여기 도착해서는 예전에 석사 논문을 쓰던 임시 자리에서 간단히 작업을 했지만, 그곳을 계속 사용할 수는 없는 일이고, 무엇보다 내 학생증이 만료가 되어서 학교 도서관 이용이라던지 저녁이나 주말에 학교 건물을 이용할 수 없기에 박사생으로써의 등록이 필수 였다. 그래서 도착한 이후에 바로 교수님이 HR 담당자에게 연락을 해서 미팅 날짜를 잡아 주었다.
도착한 지 약 일주일 정도 되고 나서 미팅을 했는데, 특별히 많은 이야기를 나누진 않았다. 미팅에서 가장 중요하게 한 일은 계약서 작성이었는데, 임시로 담당자분이 계약서를 만들어서 주셨다. 근데, 주면서 설명하기를 이 계약서는 임시 계약서일 뿐이고, 나중에 personal number가 나오면 그때 정식으로 계약서를 작성하자고 말하셨다.
... 응? 난 personal number가 있는데??
아마 나 같은 경우가 별로 없었나 보다. 당연히 그분은 내가 타국에서 처음 오는 학생이라 생각하셨고, 이 personal number에 대해 설명해주려고 하셨던 것 같다. 그래서 난 이미 personal number가 있고, 이미 학교를 다닌 지 3년이 다 되어간다 말하니 적잖이 당황하셨다. 그리고 난 내 아이디카드를 보여주며, 이미 난 번호를 받았다고 말해주니, 그럼 그냥 다시 계약서를 작성하자고 얘기하셨다. 하하
그래서 제대로 내 personal number가 기입된 계약서를 작성하고 서로 사인을 한 뒤에 온통 스웨덴어로만 되어있는 계약서 내용에 대해 하나씩 설명을 해주셨다. 다만, 정말 별거 없는 내용이었다. 계약서도 한장일뿐이고, 기간과 월급, 근무형태 정도만 적힌 간략한 계약서였기 때문이다.
그러고 나서는 아이디카드, 메일이나 학교 계정에 대해 물어보니 다른 담당자를 바로 소개해주셨다. personal number가 있으니 등록은 바로바로 가능할 것이라고 해서 찾아가서 얘기하니 정말 10분도 안되어서 등록이 완료되었고, 내 아이디와 임시 비밀번호를 얻을 수 있었다.
아이디를 건네받으면서 또 다른 약 3~4페이지 되는 문서를 같이 받았는데, 직원 아이디와 메일을 사용함에 있어서 주의사항과 관련 규정집이었다. 주의사항은 대부분 상식적인 얘기들이었다. 모든 장비들은 상업적인 목적이나 개인 용도로 사용해서는 안되며, 학교 업무 관련해서만 사용해야 한다. 다른 사람에게 암호를 가르쳐주거나 알려고 해서는 안되며 암호는 추측하기 어렵게 만들어야 한다. 등등이었다. 이와 함께, 나에게 scam 등을 조심하라고 얘기해주셨다. 요즘 들어 그런 메일이 많아졌고, 대부분은 사실 뻔하디 뻔한 사기메일이지만 가끔은 정말 정교한 메일이 와서 걸리는 사람이 있다고 한다. 나 역시 그런 메일을 받아봤고, 주변 친구 중에도 걸린 애가 있는 거 보면 참... 심각한 문제인 거 같기도 하다.
그렇게 아이디를 건네받으면 바로 사용 가능한 것이 아니라 내가 직접 Activiation을 해야 한다. 홈페이지에 들어가서 아이디와 Activiation key를 입력하면 내가 직접 암호를 설정할 수 있고, 그 이후부터 교내 IT 시스템과 메일을 사용할 수 있다. 이게 완료되면 이제 카드를 만들러 가야 한다.
학생증, 아니 이제 직원증을 만드는 것은 사실 학생 때와 동일하다. 별거 없다. 그냥 Zenit 빌딩 1층에 student office가 있는데 가서 직원 아이디를 얘기하면 바로 사진을 찍고 만들어준다. 나 같은 경우엔 예전에 쓰던 학생증이 있어서 그걸 주니까 훨씬 편하게 바로 만들 수 있었다. (물론 사진은 다시 찍었고... 못생겼다... 킁 포토샵을 해달라고 할 수도 없고 ㅋㅋ)
사진을 찍고 나면 한 5분도 채 안 걸려서 바로 카드를 만들어준다.
카드를 받고 나서 하나 충격 먹은 것은 바로 유효기간... 무려 2024년 5월까지 쓸 수 있는 카드를 바로 만들어주었다. 학생 때는 학기마다 갱신을 해야 해서 다음 해 2월, 혹은 9월 이런 식으로 갱신이 되었는데 한 번에 5년이라니 갑자기 눈앞이 아득해졌다. 하하
카드를 받음으로써 이제 웬만한 등록절차는 끝이 났다. 물론, 직원으로서의 권한 이외에도 우리 학과 내, 우리 그룹 내의 권한이 따로 있어 그것을 관리하는 분에게 메일을 보냄으로써 각종 출입권한 등을 얻을 수 있었다.
기본적인 우리 부서의 출입문, 프린트실, 실험실 등의 출입 권한이다.
논문 쓰면서 프린트를 사용하려면 항상 돈을 냈어야 했는데, 이제 교직원 신분으로 공짜로 이용 가능하다는 게 뭔가 내 마음을 뿌듯하게 했다.
그렇게 본격적인 박사 생활이 시작되었다. 사실 이런저런 것 없이도 그냥 계속 해오긴 했지만, 그래도 뭔가 이것저것 등록이 되고, 내가 혼자 쓰는 사무실이 생기니 의무감이라고 해야 할까, 더 본격적으로 해야겠다는 생각이 많이 들었다. 그런 의미에서 이번에 내가 대체 박사생으로써, 영어로 Phd student, 스웨덴어로 Doktorand 가 되어서 뭔 일을 하는지 말을 해보려고 한다.
먼저, 박사를 시작하기 앞서서 말이 나오기 시작할 때 내 지도교수님과 같이 어떤 공부를 해 나아갈지 장기적인 플랜을 세웠었다. 크게 요약하자면, 내가 석사 논문으로 썼던 것을 확장해서 Journal paper를 쓰는 것과 다른 분야에 대한 소개 한 가지. 다른 분야에 대한 얘기는 사실상 나도 이해가 잘 안 가서 정말 장기적인 계획일 뿐이었고, 내가 지금 어떤 말을 할 수 있는 단계가 아니다. 하지만 석사 논문으로 썼던 것의 확장은 뭐... 공부를 했던 것이고 접근이 쉽다고 생각했다. 그래서 당장 단기적인 계획으로는 이 journal paper를 쓰는 것을 목표로 하고, 이쪽 분야에 대해서 더욱 연구해보는 것으로 계획을 잡았다.
결국 내가 지금 하는 것은 쉽게 말해서 논문 쓰는 것의 연장선이다.
끝
이라고 하면 조금 섭섭할 수가 있으니까 조금 더 길게 설명을 하고자 한다. ㅎㅎ
내가 석사 논문으로 썼던 것은 아주아주 간단하게 요약하면 장거리 광통신 (Optical Communication)에서 쓰이는 FIR filter라는 것이 있는데 린셰핑 대학에서 이론으로만 연구했던 것을 실제 하드웨어로 제작했을 때 어떤 방식으로 제작을 할 것인지, 그때 생기는 소비 전력, 크기 등이 어떻게 될지 연구한 것이다.
그래서 당연한 말이지만, 그 장거리 광통신의 전체 시스템은 내가 만든 필터만 있는 것이 아니라 다양한 기기들이 중간에 껴있다. 그 각각의 기기마다 집중적으로 연구하는 나라, 학교, 연구실, 교수 혹은 학생들이 있고, 린셰핑 대학에서 내 지도교수님 와 우리 부서 다른 교수님들이 전체 시스템 중 Chromatic Dispersion이라는 현상에 대해 연구를 계속 진행해왔고, 내가 한 부분이 그 연구의 한 부분이었던 것이다.
그렇기에, 이 연구 과정에서 여러 가지 이론들이 도출되었고, 더 연구되어야 할 세부 분야가 많이 남아있다. 그걸 하나씩 해 나아갈 예정이다.
그리고 지금은 봄 학기가 끝나는 시기이고, 곧 여름이기 때문에 하루 종일 내 연구일에 시간을 투자하고 있다. 하지만 박사 생활이 연구만 하는 것은 아니기 때문에 앞으로는 연구 이외에도 다른 일들이 더 생길 예정이다. 구체적으로 얘기하면 올해 가을학기부터는 Lab 조교로 수업에 참가를 할 것 같기도 하고, 박사생으로써 들어야 할 필수 교양과목들이 있어서 수업도 들어야 하고, 위에 언급한 연구 들을 진행함에 있어서 내가 모자란 부분에 대한 수업도 수강할 예정이다.
글 초반에도 언급했지만, 나는 아직도 내가 뭘 하고 있는지 정확히 모르겠다. 학생도 아니고 직원도 아닌 애매한 포지션의 박사는 아직도 적응이 잘 안된다. 교수님과 주기적으로 만나면서 내가 뭘 하고 있고, 결과는 어떻게 나왔는지 계속 얘기는 하고 있는데, 교수님도 그냥 잘하고 있다고 약간 상투적인(?) 얘기만 해줘서 정말 잘하고 있는 건지도 모르겠다. 아직까지는 이렇다 할 결과물이 있는 것도 아니고, 정말 공부를 하고 있는 것뿐인데 월급을 받으니까 좀 기분도 이상하달까...
그래도 내가 지금 할 수 있는 건 그저 열심히 하는 것뿐이라고 생각해서 아침에 되도록 빨리 와서 딴짓 안 하고 최대한 많이 공부나 연구를 하도록 노력하고 있다. 이 것들로 인해서 점차 적응해서 좋은 결과를 내놓을 수 있었으면 좋겠다.
그리고 요즘엔 스웨덴어를 본격적으로 공부하기 위해 SFI를 등록해서 다니고 있다. 그래서 다음 포스팅은 SFI 등록과정과 수업에 대해 얘기를 해보려고 한다. 린셰핑에서 지낸 지 거진 3년이 다 되어가는 상황에서 이제야 스웨덴어 배우는 게 조금 웃기기도 하지만, 이제 정말 해야 하는 상황이 와버려서 일단 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