급작스럽게 산티아고를 가기로 했다.
다음에 무엇을 할지, 어떤 것도 정해져 있지 않아서 기분전환 겸 짧게 필리핀 팔라완 인근의 무인도에 다녀오겠다고 했다.(물론 혼자 가는 건 아니고) 부모님께서 필리핀이 위험지역이라고, 외교부에서 여행 자제 지역으로 지정한 곳이라고 결사반대하셨다.
필리핀을 갈 거면 차라리 미국이나 유럽을 가라고 하셨다. 나름대로 내 뜻을 꺾고, 유럽으로 방향을 틀었다. 그래서 그동안 가고 싶었던 산티아고를 혼자 갔다 오겠다고 했다. 산티아고에 대해 아는 건 없지만 막연하게 가고 싶었다. 부모님께선 역시나 좋아하진 않으셨다. 일단 혼자 가는 게 못 미덥고, 세상이 위험하니 걱정이 많으신 것 같았다. 그래도 어찌어찌 설득이 되어 출발하기로 했다.
그게 거의 출발 한 달하고도 일주일 전쯤.
사실 혼자 떠나는 것인 만큼 출발 날짜는 내 개인적인 일정보다는 비행기표값이 미치는 영향이 훨씬 크다. 3~4만 원이라도 싼 비행기를 찾고, 같은 값이라면 가보지 않은 지역을 오랫동안 머물 수 있는 곳을 찾는다. 스무 시간 남짓 그 도시에 머무르는 동안, 공항에서 도심으로 나가는 왕복 서너 시간을 빼더라도 그 도시를 구경할 수 있는 곳을 가고 싶다. 고민에 고민을 더했더니 예약 취소한 표가 세 개이고 대기하고 있는 곳이 하나, 마지막으로 몇 시간이나마 안전하게 가지고 있는 예약 표가 한 개다.
작년 겨울 유럽여행을 가기 위해, 4개월 동안 주 6일, 하루에 10시간 이상씩 동대문에 있는 여성의류매장에서 분주하게 손님을 응대하며 옷을 팔았다. 일할 때는 7천 원짜리 밥이 먹기 아까워 쇼핑몰에서 직원들이 먹을 수 있는 가장 저렴한 5천 원짜리 비빔밥을 일하는 내내 먹었다. 나중에는 한 시간 시급에 가까운 오천 원이 너무 아까워, 지하에 있는 편의점에서 컵라면 한 개와 배가 고프지 않기 위해 삼각김밥을 사 먹었다. 일하는 동안 한 번도 엉덩이 붙이기 쉽지 않았지만 배가 심하게 고프지 않았고, 먹어야 하니까 먹었다. 그렇게 한 끼를 때우면 3천 원 정도 들었다. 4개월간의 근무가 끝나는 마지막 날에는 나에게 주는 선물이랍시고 매장에서 그동안 중국인 손님들이 들고 다니던 공차 타로 버블티를 사 마셨다. 그때 생각했다. 이게 뭐라고 그동안 그렇게 부러웠을까.
그렇게 나름 악착같이 모은 돈으로 여행을 가선 당연히 편하게 썼다. 아끼지 않은 것은 아니지만 돈을 쓰지 못해 즐거운 기분이 사라지지 않을 정도로 썼다. 즐겁게 놀기 위해 힘들게 벌었던 것이니 잘 쓰면 좋겠다고 생각했다. 편한 여행을 가기 위해 준비했기 때문에 계획이 없었고, 굉장히 자유롭게 다녔다. 교통수단과 숙박만 결재해두었다. 어떤 제약도 없었다. 이게 어느 정도냐 하면, 친구와 둘이 가끔 이렇게 말하곤 한다. "바르셀로나에서 하루 종일 숙소에서 잤던 건 좋은 선택이었어."
이렇게 자유롭게 다녔던지라 일정을 꽉 채워 예약하는 것이 필요하지 않다고 생각하는 것이 당연할 수도 있겠다.
그래서, 나는?
항공권도 결제하지 않았다!
(이 글을 쓸 때는 그랬다)
아, 물론 아무 계획도 없는 건 아니고 이만큼은 있다. 물론 적어놓은 대로 되는 것은 아니지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