눈치가 없거나 아니면 비범한 안목이 있거나
사람들이 겪는 수많은 슬픔과 아픔 중에서 가장 마음을 무너지게 하는 것은 죽음과 이별이다. 사랑하는 가족을 떠나 보내는 과정은 몇 가지 단계가 있다. 첫번째는 임종이다. 고인이 눈을 감는 순간이다. 만약 유가족들이 고인의 임종 순간을 함께 할 수 있다면 마지막 호흡이 남아 있을 때, 아껴두었던 말을 하며 이별을 하게 된다. 두번째는 장례식이다. 유가족들과 지인들이 한 자리에 모여서 공식적으로 고인을 떠나보내는 시간이다. 이 때, 슬픔이 최고조에 이른다. 세번째는 추모식이다. 이미 고인의 빈자리를 그리워하며 추억을 회상하는 시간이다. 여전히 슬픔과 그리움이 남아있는 경우가 대부분이다.
장례식은 각자 문화와 전통에 따라서 형식을 갖춰 고인을 떠나 보내는 자리이다. 그래서 장례식은 엄숙하게 진행되고 유가족들을 위로하고 배려하는 마음으로 지켜야 할 에티켓이 있다. 장례식에 참석하는 사람들은 옷을 구별해서 입고, 또한 말을 조심해서 한다. 유창한 말보다는 손을 한번 따뜻하게 잡아주고 어깨를 다독여주는 온기가 유가족들에게는 더 필요한 순간이다. 말로 다 표현할 수 없는 슬픔이 유가족들의 몸과 마음을 짓누르기 때문이다.
하지만 가끔 장례식장에서 하지 말아야 하는 말을 해버리는 사람들이 있다. 넘지 말아야 하는 선을 넘어서기 때문에 주변 사람들을 당황하게 하고 때로는 눈살을 찌뿌리게 만든다. 이와 관련된 세 가지 이야기를 해보려고 한다.
1. 영화 [그대를 사랑합니다, 2011]
개인적으로 참 좋아하는 영화다. 강풀 작가의 원작을 명품 배우들의 연기로 잘 표현했다. 장군봉 할아버지와 그의 아내 조순이 할머니는 마지막 순간을 함께 하기 위한 선택을 했다. 할아버지는 치매에 걸린 아내 몸 속에 암이 퍼져버린 사실을 너무 늦게 발견했다. 말기 암 이다. 회복될 수 없다는 진단을 받고, 아내가 고통스럽게 몸부림치는 모습을 무기력하게 지켜보아야 했다. 남겨진 자녀들에게 짐이 되고 싶지도 않았다. 그래서 쓸쓸하지 않게 두 사람이 함께 떠나기로 선택하였다. 친구 김만석 할아버지는 먼저 떠나간 친구들의 뒷수습을 해주는 역할을 맡았다.
김만석 할아버지는 장례식장에 찾아가서 조문을 하고 혼자 쓸쓸하게 앉아서 소주를 마셨다. 그때, 건너편 테이블에 앉아있던 젊은 사람들이 "그만큼 살다 갔으면 호상"이라고 말했다. 그 말을 들은 할아버지는 "세상에 사람이 죽었는데 호상이 어딨어?"라고 말하며 호통을 친다. 노인의 죽음을 안따까워하기 보다는 너무 쉽게 순리로 받아들이는 젊은이들에 대한 반감이었다.
장례식은 슬픔을 위로하는 자리다. 집에 돌아가서 자기들끼리 이런 말을 하든 저런 말을 하든 누가 뭐라 하지 않는다. 다만, 장례식에서는 지켜야 할 선이 있다. 다른 사람의 죽음에 대해서 함부로 "호상"이라는 말을 내뱉는 것은 눈치도 없고 무례한 태도이다.
2. 노래 [장례희망_이찬혁]
작년 11월 45회 청룡영화제에서 상을 받았던 영화 배우들 만큼이나 화제가 되었던 가수가 있다. 축하공연을 했던 이찬혁이다. 그는 자신의 노래 파노라마와 장례희망의 코러스 부분을 섞어서 무대를 만들었다. 파노라마는 자신의 갑작스러운 죽음을 받아들이고 싶지 않은 마음을 표현했다.
이렇게 죽을 순 없어. 버킷 리스트 다 해봐야해
하지만 그의 손에는 샴페인이 들려져 있다. 영화제 시상식과 샴페인은 잘 어울리는 조합이지만 장례식에서 샴페인을 드는 사람은 없다. 그것도 자신의 장례식을 표현하는 무대라서 더 충격적인 장면이다. 심지어 샴페인을 여기 저기 흘려가며 춤을 춘다. 누군가는 잔에 담긴 샴페인을 흘리지 않으려고 조심스럽게 행동하지만, 이찬혁은 장례식과 어울리지 않는 샴페인 잔을 손에 들고 춤을 추고, 나중에는 그 잔을 뒤로 던졌다. 이찬혁은 자신의 장례식이 슬픔이 아닌 기쁨과 축제가 되기를 바랬다. 그래서 "장례" "희망"이다.
할렐루야 꿈의 왕국에 입성한 아들을 위해
할렐루야 함께 일어나 춤을 추고 뛰며 찬양해
할렐루야 꿈의 왕국에 입성한 아들을 위해
할렐루야 큰 목소리로 기뻐 손뼉 치며 외치세
죽음. 모두가 두려워하고 피하고 싶어하는 순간이다. 하지만 이찬혁은 그의 노래에서 자신의 장례식이 기쁨의 순간이 되기를 바랬다. 천국에 가는 순간이기 때문이다. 죽음이 끝이 아니라 새로운 시작이라는 사실을 믿기 때문이다. 장례식 답지 않은 장례식을 꿈꾸는 사람에게 더이상 죽음은 두려움의 대상이 아니다. 남들과 다른 안목과 확신이 있기 때문에 축제같은 장례식을 노래했다고 생각한다.
3. 하나뿐인 아들의 장례식장에서 나인성 과부가 만난 예수(누가복음 7장 11-17절)
남편을 먼저 떠나 보내고 과부가 된 한 여인이 있었다. 혼자서 하나뿐인 아들을 키워야 했다. 배경은 2,000년 전 이스라엘이다. 먼 옛날, 약자에 대한 사회적 안전망이 상대적으로 느슨했던 시대에 여자 혼자서 아들을 키워야 하는 삶은 상실과 고뇌를 매일같이 직면하며 하루 하루 버티는 일상이었다. 그러던 어느날, 하나뿐인 아들도 죽었다. 이 여인에게 마지막 남은 희망이 사라져 버렸다. 장례식에 참여한 사람들은 어떻게 이 여인을 위로해야 할지 막막했을것 같다.
동네 사람들이 이 여인의 죽은 아들을 옮기고 있었다. 무덤으로 가는 길목이었다. 마침 그 길을 지나가던 예수가 외아들의 장례 행렬에 서 있는 어머니는 발견했다. 예수는 그 여인의 슬픔을 보고 마음이 아파서 가까이 다가갔다. 그리고 한 마디를 건넸다.
울지 마세요.
지금 이런 상황에 울지 않으면, 도대체 언제 울어도 된단 말인가? 홀로 외아들을 키우던 어머니가 사랑하는 아들을 떠나 보내고 무너지는 마음으로 울고 있을 때, "울지 마세요"라는 말을 건넬 수 있는 사람을 둘 중의 하나다. 첫번째는 눈치가 없어서 상황 파악을 잘 못하고 상대방에 대한 배려가 부족한 사람이다. 이런 사람은 정답은 알지만 공감능력은 현저하게 낮은 사람이다. 말에 가시가 있어서 다른 사람들에게 상처를 주지면, 정작 본인은 자신이 틀린 말을 한 것이 아니라고 우기는 사람이다. 두번째는 남들과 다른 관점에서 상황을 파악하는 사람이다. 다른 사람들이 아직 발견하지 못한 사실을 혼자서 알고 있는 비범한 사람이다. 예수는 둘 중에 어느 쪽일까?
친한 친구 한명이 어머니를 떠나보내고 장례식을 하는데, 가까운 지인 한 분이 찾아왔다. 그 친구는 무너지는 마음으로 그동안 참았던 눈물을 그 분 앞에서 쏟아냈다. 순간 그 지인 분이 "왜 그래? 왜 울어?"라고 말했다고 들었다. "엄마가 돌아가셔서 울죠"라고 대답하고 싶었지만 참았다고 한다. 순간 눈물이 다시 속으로 들어갔다고 했다. 그 친구의 어머니가 돌아가시기 직전에 슬퍼하는 가족들을 보시며, 하셨던 말씀과 비슷하다.
뭔 일 났어? 왜 그래?
그 친구의 어머니는 자신의 죽음 앞에서 초연했다. 그래서 난 괜찮으니 너무 슬퍼하지 말라고 말씀하시며 눈을 감으셨다. 하지만 장례식에 참여한 지인의 마음은 다르다. 유가족에게 왜 울고 있냐고 말할 수 있는 사람은 죽음을 앞둔 사람이거나 혹은 그 문제를 해결해 줄 수 있는 사람 뿐이다.
예수가 나인성 과부에게 "울지 마세요"라고 말하며 장례식에서 하지 말아야 할 말을 했던 이유는 그 문제를 해결해 줄 능력이 있었기 때문이다. 예수는 자신의 말에 책임을 졌다. 죽은 아들을 다시 살려서 어머니에게 돌려주었다. 선을 넘는 말을 했던 예수는 선을 넘는(보통 사람들이 이해할 수 없는) 능력으로 기적을 일으켰다. "울지 마세요"라는 말은 상대방의 슬픔을 가볍게 여기는 태도가 아니었다. 상대방의 무너지는 마음을 공감하였다. 문제가 이제 곧 해결될테니 더이상 눈물을 흘리지 않아도 괜찮다는 말이었다.
예수가 "울지 마세요"라고 먼저 말을 하고, 그 다음에 죽은 아들을 살려냈다. 만약 죽은 아들을 먼저 살려낸 후에, "울지 마세요"라고 말했다면 쉽게 이해할 수 있다. 아니다. 죽은 아들을 먼저 살려냈다면, 더이상 울고 있지 않을테니 굳이 "울지 마세요"라는 말을 할 필요가 없겠다. 예수는 먼저 선포하고, 그 후에 자신의 말에 책임을 졌다. 예수의 말을 듣고 그 말씀이 실제로 이루어지기를 기다리고 있는 사람에게 필요한 것은 믿음이다. 믿음이 있으면 조금 더 마음 편히 기다릴 수 있고, 믿음이 없으면 조금 늦게 마음을 추스린다. "울지 마세요"라는 말씀과 실제로 눈물을 그만 흘려도 되는 사건 사이에서 기다림의 시간을 보내고 있는 사람들에게 믿음과 용기가 회복되기를 바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