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공원에서 책읽기
볕이 좋은 가을이다. 어떤 책에서 봄에는 봄볕아래서 책 읽는 영춘독서를 해야한다는 말을 읽은 적이 있다. 영춘독서도 좋지만 역시 독서는 가을인 것 같다. 봄볕은 따갑고 사방에 꽃이 피어 마음이 살랑대고 미세먼지 가득한 날도 많다. 가을은 적당히 공기가 차가워서 집에서 입는 티에 두툼한 가디건을 입기 좋다. 오전에 하기 싫은 일거리들을 적당히 끝내두고 영추독서를 나간다. 천가방에 텀블러랑 읽을 책 두권 지갑을 넣고 집을 나서서 무인 카페에 갔다. 커피 머신 사이즈에 텀블러 길이가 맞지 않아 종이컵에 카페모카를 뽑았다. 커피와 초콜릿이 합쳐진 맛이 나는 무인카페 카페 모카는 마신 직후 깊은 행복감을 맛보게 해주었다. 오후 야외 독서에 어울리는 맛이었다. 지난 번 산책하다 봐둔 벤치를 향해 간다. 가을이 짙게 물든 느티나무 여러그루를 지나 아직 텅비어 있는 동네 놀이터 벤치에 앉는다. 사람은 별로 없지만 시야가 트여 있고 근처에 브릿지 염색을 한 듯 물들기 시작한 단풍나무가 있다. 햇빛이 정통으로 들지 않아서 눈이 피곤하지 않고 등받이가 있는 벤치여서 허리나 다리가 많이 아프지 않다. 요즘 민음사 고전을 조금씩 읽고 있다. 첫번째는 유진 오닐의 밤의로의 긴 여로. 이 책은 생각보다 재밌고 분량이 작아서 잠자기 전에 침대에서 다 읽었다. 거기서 읽어야 어울리는 책이었다. 두번째 읽을 책은 버지니아 울프의 '자기만의 방". 제목만 알고 내용은 아예 모르는 책들로 골랐다. 나는 자기만의 방이 소설인 줄 알았는데 일종의 픽션 평론이었다. 당대의 사회, 과거의 사회, 별로 다를 것 같지 않은 미래의 사회를 가상의 인물과 실제 존재하는 책을 통해 얘기하는 책. 책이 전개되는 배경도 영국의 깊은 가을이었기 때문에 내 앞의 광경과 무척 어울렸다. 다만 그곳에는 도서관에도 대학 교정도 제대로 걸어다니지 못하는 한 여자가 있었다. 그 당시 대부분의 공간은 남자와 남자를 대동한 여자만 다닐 수 있었기 때문이다. 그는 자신은 들어가지 못하는 곳을 물끄러미 바라보면서 조금 수다스로운 어투로 묘사하고 이야기한다. 나는 이렇게 분량이 많은 책들이 종이에 펜으로 쓰여졌다는 사실을 생각하면 늘 놀랍긴 하다. 자기만의 방이 없어서 모두가 드나드는 곳에서 눈치를 봐가며 소설을 썼던 여자들. 금지된 욕망( 지성, 학문, 저작에의 욕망) 을 가져봤자 꺾일 수 밖에 없었던 여자들, 아이를 열 세명씩 낳아 기르면서 살아갔던 여자들. 열다섯살 부터 결혼생활을 시작한 여자들, 배울 수 없었던 여자들... 그런 여자들에 대한 이야기가 장광설처럼 전개되었다. 4장까지 읽고 작가의 말과 작품 해설을 읽었다. 일단 아무 정보도 없이 책을 읽다가 중간쯤 읽었을 때 작가의 말과 작품해설을 읽는게 괜찮은 독서라는 걸 요즘 책을 읽으며 발견했기 때문이다.
유진 오닐도 버지니아 울프도 엄청난 명성과 작품에 비해 인생이 평화롭지 않았다. 그들의 인생을 읽으며 많은 생각을 할 수 밖에 없었다. 날이 쌀쌀해져서 책을 덮고 식어버린 카페모카를 들고 집으로 걸어왔다.
이렇게 할 수 있는 시간이 그리 많지는 않다. 또다시 일에 쫓기고 바빠지겠지. 하지만 볕이 좋은 이 계절의 틈새를 한 껏 붙잡아 보려 한다. 시간을 붙잡을 때 밖에서 읽는 책은 무척 유용하다. 책은 책을 읽은 공간과 시간까지 같이 기억하게 한다. 오늘도 책을 들고 나갈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