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년이 온다/한강

by 쓰는사람 Sun

<소년이 온다/ 한강>

한강 작가의 책을 제대로 접한 것은 소년이 온다 다음 책인 <작별하지 않는다> 가 처음이다. 맨부커 상을 탔다는 채식주의자는 읽지 않았다. 아주 오래 전 여수의 사랑을 잠깐 읽다 말았던 기억이 있다. 부유하는 듯한, 사람이 아니라 영혼이 말하는 것 같은 그의 문체가 나와 맞지 않는다고 느꼈다.
소년이 온다.는 5.18을, 작별하지 않는다. 는 4.3 을, 다룬 책이다. 작별하지 않는다 서두에 작가는 자기 자신임이 분명한 화자를 빌어서 그가 소년이 온다를 쓰고 얼마나 망가지고 아팠는지를 서술한다.
소년이 온다에 대한 성찬을 오래 전부터 들어왔지만 읽고 싶지 않았고 읽을 수도 없었다. 결국 사두고도 한참을 안 읽다가 어젯밤 늦게 읽기 시작해 새벽에 다 읽었다.
분명히 악몽을 꿀거라고 생각했는데 꿈에 나는 작가와의 만남을 또 하고 있었다. 강원도에 있다는 모르는 학교였고 아이들은 아무도 내 책을 읽지 않아서 나는 처음부터 나를 소개해야 했는데 준비한 파워포인트는 스크린이 고장나 틀 수 없었고 usb도 없고 인터넷도 되지 않고 심지어 내 책도 없었다. 도서관에 가서 찾아보려고 복도를 달려갔지만 도서관은 계속 다른 곳으로 변했다. 멀리서 아이들이 내가 오기를 지켜보며 이상한 자세로 서 있었다. 2019년에 우리반이었다가 전학간 아이가 그 곳에 있어서 속으로 이 아이의 세계는 여기서 계속 진행중이구나. 역시 평행우주라는 것은 있는 것이었어. 이런 괴상한 생각을 하다가 알람 소리를 듣고 깼다.
깨서도 소년이 온다를 계속 생각했다. 한강 작가에게 어떻게 그 소설이, 아니 소설의 여러 주인공 중 한 명인 동호가 걸어들어갔을까. 너무나 잔인하고 거대하고 이해가 불가한 한 사건이 가장 연약한 사람의 모습을 하고 우리에게 올 때 그를 맞이하는 사람들이 어떻게 무너지고 마는가 그런 생각.

' 군인들이 압도적으로 강하다는 걸 모르지 않았습니다. 다만 이상한 건, 그들의 힘만큼이나 강렬한 무엇인가가 나를 압도하고 있었다는 겁니다.
양심.
그래요 양심.
더이상 두렵지 않다는 느낌, 지금 죽어도 좋다는 느낌, 수십만 사람들의 피가 모여 거대한 혈관을 이룬 것 같았던 생생한 느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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순간 깨달았습니다. 그들이 원한 게 무엇이었는지. 우리를 굶기고 고문하면서 그들이 하고 싶었던 말이 무엇이었는지. 우리가 깨닫게 해주겠다. 냄새를 풍기는 더러운 몸, 상처가 문드러지는 몸. 굶주린 짐승같은 몸뚱어리들이 너희들이라는 걸. 우리가 증명해주겠다. '

나는 이 책의 누군가가 진술한, 지금 죽어도 좋다는 느낌, 거대한 혈관이 된 환희가 양심이라고 생각하지 않는다. 깨지기 쉬운 유리같은 영혼을 가진, 훼손되고 망가지는 몸을 가진 인간이, 자신과 비슷한 인간을 차마 그 곳에 두고 나올 수 없어 벌벌 떨면서도 돌아 들어가는 그것이, 양심이라고 생각한다. 한강작가가 다락에 감춰진 5.18 사진첩에서 발견한 소녀의 훼손된 신체를 보고 자기 안의 연한부분이 깨어졌다고 느낀 것처럼. 이 책의 모든 인물들이 차마 손을 놓지 못하고 찾아 헤매거나 등을 떠밀거나 함께 죽거나 서서히 망가져 간 것 처럼.

소년 동호가 하얀 교복 셔츠를 펄럭이며 신나게 자전거를 탄 천변 도로, 깃이 넓은 수피아 여고 교복. 상무관, 중흥동, 귓전에서 바로 들리는 것 같은 전라도 사투리. 일곱살 때 봤던 공수부대의 피묻은 개머리판, 엄마가 밤새도록 들었다던 도청의 총소리. 이 모든 것들 때문에 책을 읽다 말다 하고 숨을 쉬었다 말았다 하면서도 울지는 않았다.

' 목이 길고 옷이 얇은 소년이 무덤 사이 눈 덮인 길을 걷고 있다. 소년이 앞서나아가는 대로 나는 따라 걷는다. 도심과 달리 이곳엔 아직 눈이 녹지 않았다. 얼어 있던 눈 더미가 하늘색 체육복 바지 밑단을 적시며 발목에 스민다. 그는 차가워하며 문득 고개를 돌린다. 나를 향해 웃는다.'

이제 당신이 나를 이끌고 가기를 바랍니다. 당신이 나를 밝은 쪽으로 빛이 비치는 쪽으로, 꽃이 핀 쪽으로 끌고 가기를 바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