구리를 걸었다. (변한 듯, 변하지 않은)
20대 후반에 구리에 살았다. 구리시청 앞 이문안 저수지 근처의 빌라였다. 지금은 구리 근처에 산다. 지척이지만 내가 살았던 동네라는 곳은 일삼아 가지 않으면 발길이 가지 않는다. 특별한 용무가 있는 것도 아니고 먹고 싶은 맛집이 있는 것도 아니고 볼일이 있는 것도 아닌데 황금같은 휴일에 그냥 살았던 곳이라는 이유만으로 옛날 동네를 간다는 것이 생각처럼 쉬운 일은 아니다.
하지만 일년에 한두번쯤은 언제든 살았던 곳을 찾아가는 것이 좋은 것 같다. 나는 장소를 그리 많이 옮겨다니며 산편이 아니지만 어느덧 다섯개 정도의 동네가 역사의 뒤안길에 있는 나이가 되었다. 토요일 아침 길을 나선다. 구리와 남양주를 잇는 왕숙천 다리를 지나 롯데 백화점 앞길을 지나 돌다리 시장으로 접어든다. 돌다리 시장은 제법 깔끔하지만 주변에 유흥업소가 너무 많다. 서울에서 밀려난 각종 룸술집, 모텔, 수상쩍은 노래장등이 즐비하다. 휴일아침 이런 곳 주변을 지나면 뭐라 말할 수 없는 이상한 기분이 든다. 괴괴한 고요와 간밤 취기의 증거들이 곳곳에 널부러져있다. 시장에서 팔토시를 샀다. 편의점에 없어서 혹시나 시장에는 있나 물었더니 어김없이 있었다. 리어카 위에 때타올부터 양말, 모자, 등등 소형 다이소 같은 모양새의 노점상이 돌다리 시장에는 몇 군데 있다. 시장을 나와 교문 사거리쪽으로 걷는다. 교문 사거리는 엄청 오래 전에 들어온 상가건물이 있지만 이상하게 한가하다. 사람들이 걸어다니는 곳이 아닌것 같다. 불과 몇 미터 떨어진 한양대 병원 앞이 북적거리는 것과 대조를 이룬다. 딸기원 마을이 있는 언덕으로 접어들면 인적은 더더욱 드물어진다. 딸기원은 지날 때마다 고개를 기웃거리며 보게 되는 곳이다. 서울과 구리의 경계에 있다는 점은 비슷하고 장소가 주는 정취도 크게 다른 것 같지 않은데 동쪽 경계인 아치울 마을과는 너무나 다른 모습을 하고 있다. 동네 안으로 들어가면 생각보다 넓고 깊은 동네 규모에 놀라게 된다. 딸기원을 지나면 망우리 고개다. 망우리 고개는 어릴 때 무서운 이야기에 단골로 등장하던 곳이다. 택시기사의 간담을 서늘하게 한 하얀 소복을 입은 귀신은 망우리 공동묘지의 원혼이었다.
중랑 캠핑장으로 들어가는 곳까지 걸으면 구리 둘레길은 두갈래로 갈라진다. 오른쪽으로 가면 산을 굽이굽이 돌아 갈매동까지 가게 되고 왼쪽으로 가면 망우리 공원으로 들어가 아차산으로 내려가게 된다. 지난번에 오른쪽으로 갔으니 이번엔 왼쪽. 아차산은 여러 동네에 걸쳐있는 넓고 완만한 산이라 사방으로 길이 뚫려있고 오고 가는 사람도 많다. 계속 오르막으로 올라가고 마스크를 쓰고 있어 숨이차고 힘들다. 숲길이어서 초여름 걷는길로는 그만인 코스다. 온갖 연령대의 사람들이 곳곳의 출입구에서 올라온다. 아스팔트 길을 걷다보면 아차산으로 내려가는 길이 나온다. 지금부터는 내리막. 단단하게 다져진 산길은 걷기가 수월하고 짙은 초록의 숲 사이로 부는 바람이 시원하다. 금세 구리시청 옆쪽으로 내려온다. 출근을 하기 위해 버스를 기다리던 정류장이 건너편으로 보인다. 도림초 앞으로 이어진 육교를 건너 골목으로 접어든다. 골목 초입에 반가운 가게가 있다. 나인 빌리지라는 독립 서점이다. 들어가서 살펴보니 큐레이션이 예사롭지 않다. 독특한 주제의 에세이들과 독립출판물, 잡지들이 보인다. 캐럴라인 냅의 <드링킹>과 황정은의 <연연세세>를 사서 나왔다. 이문안 저수지 주변에는 카페들이 많이 생겼다. 다세대 주택 바깥으로 늘어진 들장미들과 한낮의 고요한 골목을 멍하니 쳐다보며 시원한 커피를 들이킬 수 있는 그런 카페들이다. 커피를 마시고 교문초등학교쪽으로 방향을 틀면 예전에 살았던 집이 있다. 비오는 날 집 앞 영화마을에서 서둘러 비디오를 빌려 뛰어들어갔던 기억, 눈내리는 겨울 배를 깔고 엎드려 해리포터를 열심히 읽던 기억이 마구잡이로 섞여 떠오른다. 직장인이었지만 아직은 어른이 아닌 것 같은 기분으로 살던 시절이었다. 다시는 20대로 돌아가고 싶지 않다고 늘 생각했지만 그 집 앞에 서 있으니 그때가 좋았던 것 같기도 하다.
집에 돌아와서 <드링킹>을 읽었다. 주말 3일을 내리 마시던 술을 끊기로 결심했다. 그리고 다음 주가 되어서는 주말 3일 중 1일만 마시는 걸로 계획을 바꿨다.
사진은 나인빌리지북스 인스타에서 데려옴. 걸으면서 사진을 잘 찍지 않는데 이제는 좀 찍어봐야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