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걸음의 여백
사람들의 부산한 소리에 잠이 깨 시계를 보니 아직 6시가 채 되지 않았더라. 난 밤새 관절을 꺾어가며 잠을 잤어. 이 의자는 누우면 정확히 관절 하나가 의자 밖으로 나갔는데 목을 집어넣으면 허리가 나오고, 허리를 집어넣으면 목이 빠져나와. 그렇게 2시간 간격으로 하나의 관절을 고생시키다가 더 이상 못 견디겠다 싶으면 자세를 바꿨어. 추위는 덤이었고. 그래도 잠은 왔어. 꿈도 꾸면서. 다행히 악몽은 아니었어.
잠을 깰 겸 오들오들 떨면서 열차 밖으로 나가보니 다른 사람들도 오들오들 떨며 삼삼오오 모여 씻고 있었어. 한 명이 생수통을 잡아주면 한 명이 세수를 하는 식으로. 나도 그들 틈에서 양치를 하고 모르는 사람이 잡아주는 생수통의 물로 세수를 했어. 나도 그를 잡아줬고. 대부분이 나처럼 그냥 얼굴에 물을 적시는 수준이었지만 젊은 아이들은 달랐어. 눌린 머리에 스프레이를 뿌려 다시 세우고 화장도 하더라. 누구 보라고 저리 꾸밀까 싶다가 저 아이들이 보낸 어젯밤은 나와 다르겠구나 싶었어. 어쩌면 수학여행에서의 마지막 밤처럼 특별하지 않았을까? 하루 사이에 아는 얼굴이 많아진 것도 신기해. 사진을 찍었던 사람을 만나면 반갑게 인사했고, 이 추위를 같이 견딘 전우애 같은 것도 느껴졌어. 재밌는 변화도 감지됐는데 분명 어제까진 혼자 다니던 폴란드인 여행자는 다른 여행자의 손을 꼭 잡고 있었어. 그는 이 혼란과 추위를 틈타 연애를 시작한 것 같아. 열차 사고로 인한 연애라니, 뭔가 굉장히 드라마틱 해서 나도 그 주인공이 되고 싶지만 내가 한 거라곤 관절을 꺾어가며 잠을 잔 것 밖에 없어. 당연히 그의 밤도 나와 달랐겠지? 그는 나와 눈이 마주치자 씨익 웃었는데 이 새벽 유일하게 추워 보이지 않았어.
아침을 먹으러 역사 앞 노천카페로 가니 이미 많은 사람들이 모여 있었어. 난 연유가 듬뿍 들어간 믹스커피와 인도의 ‘난'과 비슷한 빵을 시켰고 맞은편 부부에게 드릴 빵도 포장했어. 따뜻한 차 한 잔은 이럴 때 참 소중해. 한 모금을 마시니 아무것도 예상할 수 없는 이 시간에 작은 여백이 생겨. 그리고 그 여백에서 네게 편지를 써. 어쩌면 이런 여백의 갖기 위해 여행을 떠나는 게 아닐까 싶어. 지금 이 순간은 너무 춥고, 언제 출발할지 모르는 기차와 꼬여버린 일정에 대한 걱정 그리고 폴란드 여행자 때문에 배가 좀 아프지만 이 모든 것에 밑바닥엔 편안함이 있어. 어깨에 무거운 짐은 메고 있지만 편안한 의자에 앉아 숨을 고를 때의 기분과 비슷해. 하지만 과연 이 편안함을 행복이라 부를 수 있을까 생각하면 난 다시 망설이게 돼.
어젯밤 행복하냐는 나의 물음에 아저씨는 망설임 없이 “Yes”라고 대답하셨잖아. 하지만 그가 "And you?”라고 되물었을 때 난 한참을 생각하다가, 그래도 지금 이 순간은 행복한 것 같아서 “Yes”라고 대답했어. 잠이 들면서 이거 좀 이상한대? 싶더라. 바로 직전 아저씨가 "Are you OK?”라고 물었을 땐 망설임 없이 대답할 수 있었거든. 반면 행복에 대한 물음은 한참을 고민하고도 확신 없이 대답하게 돼. 도대체 "Are you OK?”와 “Are you happy?”는 어떤 차이가 있는 걸까? 왜 행복에 대한 질문은 내 안에서 더 많은 필터를 거친 후에 답하게 될까?
솔직히 난 어떤 순간을 행복이라 부를지 아직 잘 모르겠어. 내가 머릿속에 그리고 있는 ‘행복’은 엄청 대단하고, 극적이고, 감동적인 순간에 표현해야 할 감정이라 지금처럼 그저 편안한 상태를 행복이라 불러도 될지 의심이 들어. 그래서인지 마음속에선 "고작 이 정도가 행복이라고? 행복이 뭔지 모르는 거 아니야?” 자기검열을 하게 돼. 사실 내가 아저씨께 행복하냐고 물었던 건 이 정도의 무겁고 대단한 의미에서 한 질문이었는데 그가 너무 가볍게 대답한 거지. 어쩌면 그게 행복의 방법일지도 모르겠다. 행복의 어깨에 힘을 빼는 것.
‘나 행복해’라는 말을 쓰는 게 익숙하지 않은 탓도 있어. 돌이켜보면 초중고를 다니면서 어떤 선생님도 내게 행복하냐 물은 적이 없거든. 영화 일을 할 때도, 본격적으로 돈을 벌기 시작한 이후 역시 마찬가지야. 오히려 스스로에게 묻고 대답한 적은 있지만 내가 누군가에게 또 누군가가 나에게 물은 적은 거의 없어. 그래서 난 이 말과 더 친해질 필요가 있을 것 같아. 마치 내가 누군가의 사진을 찍을 때 그 사람과 더 많은 시간을 보내고, 더 가까이 앉고, 자주 눈을 맞출 때 더 나은 사진이 찍히는 것처럼 행복도 그렇게 접근해야 하는 게 아닐까. 그래서 오늘부터는 나에게 또 다른 사람에게 더 자주 물으려 해. "Are you Ok?"처럼 편하게 말이야.
마지막으로 어떤 일을 받아들이는 태도가 중요한 것 같아. 이 열차엔 대략 150명 정도가 타고 있으니 이 기차 사고를 받아들이는 150가지 태도가 있을 거야. 150개의 다른 밤이 지났고 이제 150가지의 다양한 아침이 찾아왔겠지. 누군가는 이 순간을 인생 최악의 여행으로 기억할 테고, 누구는 사랑하는 사람을 만난 최고의 사건일거야. 누구는 옆 칸에 앉은 아이가 신경 쓰여서 머리에 스프레이를 뿌리고, 나처럼 그저 관절이 아픈 사람도 있고. 난 점쟁이가 아니니 누가 행복하고 불행한진 알 수 없지만 누가 마음에 여유가 있는진 조금은 보여. 예를 들어 아직까지 자고 있을 맞은편 아저씨는 아주 여유 있는 사람이지. 반면에 너무 바쁘게 쫓겨 불안한 사람의 마음엔 사건도 사람도 들어갈 틈이 없어. 들어온다 해도 제대로 경험할 수가 없고. 내가 이걸 아는 이유는 몇 년간 그렇게 살아봤기 때문이야. 안타깝게도 그런 삶에서 행복을 느끼긴 힘들더라. 그래서 구체적으로 머릿속에 그려봤어. 먼저 내 마음을 떠올리고 그 옆으로 한걸음 정도의 여백을 만들어봤어. 내 마음의 모양은 언제든 바뀔 수 있지만 또 많은 것들이 들어왔다 나갈 수 있는 거지만, 이 여백은 언제나 있는 거라고. 그러니까 언제든 여기서 쉴 수 있다고. 이렇게 생각하고 나니 살며시 웃음이 나더라. 그리고 그 순간 내 미소가 조금 편해졌다고 느꼈어. 지금 이 미소를 사진으로 남기면 좋을 것 같아 아이폰 카메라를 켰는데 정말 놀랐어. 얼굴은 때구정물로 얼룩지고, 머리는 떡져서 달라붙고 왜 내겐 폴란드인 같은 드라마가 일어나지 않았는지 알겠더라. 그래도 난 잘 있어. 수영이 넌 행복한지 궁금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