난 자리
영영 멈춰 있을 것 같던 열차는 9시가 되자 경적 몇 번을 울린 뒤 천천히 움직이기 시작했어. 몇몇 승객들은 박수를 치며 환호성을 질렀지만 대부분이 침착했고 서로를 보며 웃는 정도였어.
열차는 그렇게 오래 정차했음에도 급할 게 없다는 듯 원래의 느린 속도로 달렸고, 그 느린 속도에 익숙해질 때쯤 객실 안은 다시 평범한 일상으로 돌아갔어. 창문 밖으론 풍경이 지나갔고, 사람들은 이야기를 나누다 잠이 들기도 하고, 새로운 역에 정차하면 누군가는 내리고 또 다른 승객이 올라탔어. 하나의 사건이 그렇게 지나가고 있었어. 열차 사고는 내 여행에서 나름 큰일이었는데 말이야. 미얀마라는 장소, 기차라는 공간, 1박 2일이란 시간이 나를 거쳤다가 다시 멀어지는 느낌이 들었어. ‘시간' 속에 사는 건 늘 오고 감을 겪게 돼. 새벽에 날 그토록 힘들게 했던 추위는 오후 햇살에 어느덧 잊혔고, 어젯밤 내 마음에 여러 질문을 던졌던 아저씨의 말도 지금은 나름의 결론을 낸 다음 지나갔으니까. 금방 사라지는 것도 있고 오래 머무는 것도 있어. 영화도 그래. '실패한 영화인’이란 이름을 너무 오래 붙들고 있었던 건 아닐까, 그 시간 동안 내 젊음을 낭비한 게 아닐까 하는 후회가 들지만- 한 편으로는 그토록 오래 붙잡고 있어야 할 이유가 있었으리라 생각해. 중요한 건 그것이 지나가고 난 자리에 무엇이 남았는지가 아닐까 싶어.
조금 전엔 사고 현장을 지났는데, 저렇게 거대하고 육중한 열차가 어떻게 쓰러질 수가 있지? 싶더라. 사고가 난 열차와 내가 탄 열차는 불과 몇 시간 간격으로 달렸으니 그 사고가 내게 일어났다 해도 이상한 일은 아닐 거야. 그 몇 시간이 생과 사를 가른 거지. 쓰러진 열차를 보면서 만약 '내가 어제 열차 사고로 죽었다면?’ 이란 생각을 하니까 슬프기보단 억울했어. 난 해내고 싶은 일이 정말 많고, 그 많은 일 중 끝을 본 게 아직 아무것도 없는데- 너무 억울해서 나도 모르게 ‘지금은 안돼, 절대 안 돼.’라고 혼잣말을 했어.
여행을 온 뒤 더 확신이 들지만 난 카메라로 무언가를 찍는 게 좋아. 그게 사진이건 영상이건 상관없이. 또 내가 가진 카메라로 밥은 먹고 살 수 있을 정도의 돈을 번다는 것에 진심으로 감사해. 이게 이번 생에 내 복이구나 싶을 만큼 감사해. 인레 호수에서 노을을 바라보기만 했을 때- 난 내가 이 일을 정말 좋아하는구나 느꼈어. 오히려 사진을 찍지 않으니 더 잘 알게 되더라. 한 편으론 후회도 됐는데, 내가 영화 일을 너무 급하게 그만둔 게 아닐까 하는 생각을 그 순간 같이 했었어. 왜냐하면 그 ‘좋아한다'라는 감정이 과거에 내가 영화에게 가졌던 감정과 너무나 동일했거든. 후회한다는 건 한편으론 인정한단 뜻이기도 하니까. 어쨌든 이젠 영화가 지나간 자리를 무엇을 채울지 고민해. 난 계속 카메라를 들고 있고 싶고, 그 일이 이렇게 여행을 다니며 사람들을 만나 사진을 찍고 그 순간을 글로 옮기는 일이면 어떨까 싶어. 그리고 이번에는 조금 길게 봤으면 해. 그게 후회를 조금이나마 줄일 수 있는 방법이니까. 머릿속에 바로 떠오른 건 10년인데, 처음엔 너무 긴가 싶다가 10년 전을 돌아보니 그리 긴 시간은 아니더라. 그래서 이걸 내 두 번째 소원으로 정했어. 10년간 이 일을 계속하는 것.
아저씨와 아줌마는 곧 내리신다고 해. 두 분이 내린 다음 역이 내가 내릴 역이니 그럼 39시간 만에 미치나에 도착하게 돼. 나도 모르는 사이에 두 분과 정이 들었는지 헤어지려고 하니 마음이 먹먹하네. 두 분이 계셨던 내 마음 자리엔 온기가 오래 남을 것 같아. 차창 밖으론 이 열차 안에서 보는 두 번째 노을이 빠르게 지고 있고, 두 번째 추위가 찾아오고 있어. 솔직히 지금 내 머릿속엔 뜨거운 물로 하는 샤워와 푹신한 침대로 가득 차 있어. 어서 미치나에 도착했으면 좋겠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