초심자의 행운
미치나에 온 지 나흘이 지나서야 편지를 써. 숙소를 잡고 이틀 동안은 내리 잠만 잤어. 내가 머문 숙소는 중국인 형제가 운영하는데 아침마다 맛있는 중국음식을 줘서(그것도 뷔페로) 그걸 먹고 잠들었다가 해가 지면 일어나 숙소 앞 포장마차에 가서 국수를 먹고 다시 잠들기를 반복했어. 그렇게 이틀을 보내고 나니 몸이 원래대로 돌아오는 게 느껴지더라. 생각해보면 바간에서부터 미치나까지 쉬지 않고 이동만 했으니 몸이 지칠만했어. 어제부터는 오토바이를 빌려 가까운 곳부터 구경하고 있어.
미치나는 다행히 내가 생각했던 것만큼 위험한 곳은 아니었어. 외곽으로 가면 총든 군인이 있고, 여행자가 접근할 수 없는 지역도 있지만 상상했던 것처럼 험악하진 않아. 중국과 가까운 까닭에 미얀마인만큼 많은 중국인이 있고 이슬람인도 꽤 있어. 편지엔 이렇게 적고 있지만 이렇게 인종을 나누는 게 무의미하단 생각을 여기 와서 하게 돼. 막상 이야기를 나누며 친해지고 나면 다 똑같은 사람이구나 싶거든. 사실 난 인도인과 이슬람인에 대한 안 좋은 고정관념이 있는데 여기서 만난 이슬람인 덕분에 많이 깨졌어. 이런 게 여행의 장점이 아닐까 싶어.
어젠 사진을 찍기 위해 미치나에서 가장 오래되고 큰 시장을 무작정 찾아갔었어. 계속 거절당하다가 커피 한 잔 마시고 하잔 심정으로 시장 안 가게에 앉았는데 한 이슬람인이 오더니 “도와줄까?" 물어보더라고. 보통 이런 경우엔 안 좋은 경험이 더 많아서 바로 거절했어. 근데 이 친구가 자기가 이름은 ‘라미’고 이 가게 주인이라고 하는 거야. 작은 가게였지만 그가 주인 같진 않았거든. 재차 묻길래 내가 시장 상인을 찍고 싶다고 말하니 잠깐 기다리라 하고 사라졌어. 이때까지만 해도 난 빨리 이 자리를 떠야겠다 생각 했으니, 내가 그를 얼마나 경계했는지 알겠지? 그는 건장한 장정 넷을 데리고 내 앞에 다시 나타났는데 가장 앞엔 ‘사이먼’이란 이름의 청년이었어. 오자마자 넙치같은 큰 손으로 악수를 청하는데 이게 무슨 상황인가 싶더라. 뒤에 따라온 세 명은 같이 일하는 동료라고 했어. 라미는 그들 모두에게 커피를 주며 내 얘기를 들어보라고 했어. 난 마치 PPT를 발표하듯 그들에게 날 소개하고 또 지금까지 찍은 사진을 보여주며 이런 식으로 미치나 시장 사람들을 찍어보고 싶다고 얘기했어. 사이먼은 그 사진들을 보면서 "넌 사람을 좋아하는구나.”라고 말했어. 라미가 사이먼을 데려온 게 얼마나 절묘한 일이냐면 그는 이 시장에 얼음을 대는 일을 하고 있거든. 그러니까 이 시장에서 생선과 고기를 파는 상인은 적어도 하루에 한 번은 그를 만나야 해. 난 그를 따라다니며 사진을 찍으면 되는 거고. 내 얘기를 다 들은 사이먼은 뒤의 동료들과 잠깐 얘기를 나눈 후 "우리도 사진 찍는 거 좋아해. 내일 아침에 와서 찍어도 좋아.”라고 허락한 뒤 "근데 궁금한 게 왜 하필 우리 사진을 찍어?”라고 물었어. 그가 말하는 ‘우리'가 시장 상인을 말하는 건지 아니면 사람을 뜻하는지 모르겠지만(아마도 전자겠지만) 난 그 질문이 계속 마음에 남아. 때때로 스스로에게 이 질문을 할 때도 있는데 그때마다 난 늘 맨 처음 카메라를 사던 날을 떠올리게 해. 그땐 돈을 벌기 위해 카메라를 샀던 게 아니라 무언가를 정말 찍고 싶어서 카메라를 샀었거든.
나 "시장을 좋아해.”라고 대답했고 사이먼은 웃었어. 내 말은 사실이었지만 스스로에게 만족스러운 대답은 아니었어. 정말로 내가 이 일을 10년간 하게 된다면 그 10년 동안 꾸준히 답을 찾아야 할 질문일 거야. 왜 사람을 찍는지 말이야.
그렇게 오늘 아침 8시에 그들을 만나 촬영을 했어. 사이먼과 친구들이 얼음을 나르면 난 그 뒤를 졸졸 따라갔고, 사이먼이 가게에 들어가 활기차게 인사하면 나도 뒤에서 손을 흔들었어. 그는 날 한국에서 온 친구라 소개했고, 덕분에 난 편하게 촬영할 수 있었어. 돌와서 오늘 찍은 사진을 리뷰를 해보니 내가 엄청 특별한 사진을 찍은 건 아니야. 그저 그들이 일하는 모습이 자연스럽게 담기길 원했어. 인물사진은 인물 자체가 가진 매력도 중요하지만 사진 속 그 사람이 있는 배경도 중요하다고 생각해. 그 사람이 서있는 장소, 앉는 의자, 주로 쓰는 도구, 일을 할 때 입는 옷 등이 그 인물에 대해 이야기해주기도 하거든. 카메라의 셔터는 120분에 1초처럼 순간을 담아내지만 그 결과물인 사진 속엔 그보다 더 긴 시간이 담기기도 해. 마치 한 사람이 몇십 년간 지어온 표정이 그 사람의 인상이 되는 것처럼 난 공간과 사물에도 그런 표정과 정서가 시간과 함께 담겨있다고 믿어. 내가 미치나 시장을 좋아한 건 그런 배경이 잘 드러나는 곳이기 때문이야. 지금 생각해봐도 라미에서 사이먼으로 다시 시장 상인으로 이어진 인연은 큰 행운이었어. 문득 초심자의 행운이란 말이 떠오르는데 (이 나이에 스스로를 초심자라 부르는 게 어색하지만) 어쨌든 10년간 이 일을 해보자 마음먹고 처음 찍은 분들이라 무척 감사해. 하지만 난 이렇게 큰 행운이 자주 있는 일은 아니란 걸 알아. 또 모든 일엔 오르내림이 있다는 것도 알고. 이럴 때 보면 영화 일을 하며 배운 게 꽤 많네. 사실 이것만 알고 가도 마음이 한결 편한데 말이야. 어쨌든 오늘은 내가 이 일을 정말 시작했고, 내 두번째 소원이 이뤄지고 있단 느낌을 받았어. 난 미치나에서 하루 더 머물고 인도지로 떠날 예정이야. 인도지엔 미얀마에서 가장 큰 호수가 있다고 해. 그리고 그곳이 이번 미얀마 여행의 마지막 장소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