난 이런 걸 좋아해

다섯 번째 편지

by 박원진

수영아. 너에게 편지를 쓸 땐 너무 많은 얘기를 적는 것 같아 걱정이 되면서도 막상 다 쓰고 나면 여전히 하지 못한 말이 남아 있어. 지금도 잠에서 깨어 잠깐 일기를 쓴 뒤 너에게 편지를 써. 어떤 말은 일기장에 쓰는 것보다 편지로 적는 게 더 잘 써지거든. 지금은 새벽이고 아직 5시가 안 됐어.

돌이켜보면 영화는 나의 돈과 젊음, 그리고 젊음이 떠난 뒤의 시간까지 빼앗아갔지만 그 와중에 남기고 간 것도 있어.ᅠ


첫 번째는 모든 걸 기록하는 습관이야. 독립영화판에서 내 첫 직책은 ‘스크립터’였어. 사실 그 감독은 완전히 사기꾼이었는데, 그땐 아무것도 모르니까 스태프가 된다는 사실만으로 기뻤어. 내가 했던 일은 촬영 날의 날씨부터 시작해서 각 신(scene)의 카메라 앵글, 배우의 동선, 의상 등을 체크하는 것이었어. 지금 생각해 봐도 꼼꼼하게 잘했던 것 같아. 좋아하기도 했고. 나에겐 스크립트 노트 말고 다른 노트가 하나 더 있었어. 그것에는 훨씬 개인적인 얘기를 기록했어. 촬영 날 있었던 사사로운 사건들과 오늘은 감독이 어떤 ‘곤조’를 부렸는지, 스태프들 간의 보이지 않는 기싸움과 그 틈을 비집고 피어나는ᅠ연애 기류까지.ᅠ

이 습관은 지금까지 이어지고 있어. 여행할 때도 한 도시의 인상부터 시작해서ᅠ그날 본 비둘기의 생김새까지 모든 걸 글로 남겨놔. 어떤 날은 도시의 흙 색깔과 촉감을 적기도 해. 사람은 더 자세하게 적고. 잠깐 스치더라도 특별한 인상을 준다면 짧게라도 기록해.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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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를 들면 이런 식이야. 시장에서 고기를 손질하던 상인의 눈빛과 팔 근육(왼손잡이인 그의 팔은 막 용광로에서 꺼낸 고철같이 붉고 단단했어),ᅠ옆방에서 잠꼬대하는 여행자의 특이한 목소리(마치 외계인과 교신하는 것 같았어. 다음날 그를 만나보니 일본인이었는데 원래 목소리는 평범해서 더 놀랐지), 그리고 사원 구석에서 몰래 취침 중인 스님의 자세와 관련해서도(나는 요가가 저렇게 좁은 곳에서 몰래 자다가 생겨났을지도 모른다고 생각해).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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두 번째는 카메라를 통한 기록이야. 독립영화 일을 할 땐 수입이 거의 없어서 광고나 홍보 영상 쪽 연출부 일도 했어. 여러 프로덕션을 전전했고, 그중 한 곳에서 자주 일을 받았는데 촬영감독이 몹시 게을렀어.ᅠ심지어 자기가 피곤한 날이면 나한테 찍는 법을 대충 알려주곤 차에 가서 잠을 자는 거야. 지금 생각하면 어이없지만 그 감독 덕분에 촬영이란 걸 배우게 됐어. 1년 정도 지나 그는 회사에서 쫓겨났고 내가 그 자리에 들어갔어. 그가 받던 액수보다는 적었으나 연출부 아르바이트에 비하면 훨씬 큰돈이었지. 조금씩 돈이 모이자 내 카메라를 사게 됐고. 그땐 영화를 찍기 위해 샀지만 지금은 그 카메라로 사진을 찍어.

이렇게 두 가지 방식으로 내가 본 것들을 기록해. 찍지 못한 건 글로 적고, 적지 못한 건 사진으로 남겨. 두 가지를 같이할 때도 있어. 이 얘기를 하는 이유는 오늘도 악몽을 꿨기 때문이야. 미얀마에 온 뒤로 자주 같은 꿈을 꿔. 대부분 소리를 지르거나 울다가 잠에서 깨곤 해. 서울에 있을 땐 이런 적이 거의 없었어. 처음엔 혼자 낯선 곳을 여행하니 두려운 마음에 그러나 보다 하고 넘겼는데, 양곤에서 꾸던 꿈을 만달레이에 와서도 꾸니까 이젠 좀 이상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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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악몽은 늘 극장에서 시작해. 나는 좌석에 앉아 영화를 보고 있고 스크린 속 영화는 매번 바뀌어. 사실 상영되는 영화는 중요하지 않아. 극장에 앉아 있는 사람들이 중요하지. 보통 내 앞좌석 사람이 가장 먼저 나를 쳐다봐. 한번 쳐다보기 시작하면 나에게서 눈을 떼지 않아. 그 시선을 피해 고개를 돌리면 옆 사람 역시 나를 쳐다보고 있어. 어찌할 바를 모르다가 뒤를 돌아보면 뒷좌석 사람들이 모두 나를 보고 있는 거야. 그렇게 극장 안의 수많은 사람들이 영화 대신 나를 쳐다봐.

소리를 지를 수 있을 땐 바로 꿈에서 깨는데, 그러지 못하면 나는 아이처럼 울기 시작해. 정말로 아이처럼 울어. 그나마 다행인 건 누구도 자리를 벗어나 다가오진 않는다는 거야. 나는 극장 의자가 작은 요람이라도 되는 것처럼 그 안에 몸을 웅크린 채 어서 영화가 끝나 불이 켜지기만 기다려. 그러다가 잠에서 깨. 몇 년 전에도 같은 악몽을 꾼 시기가 있어. 꽤 오래전 일인데 이상하게 여행을 온 뒤 또다시 시작됐어.ᅠ

혼자 있는 시간이 많아지다 보니 옛날 기억이 떠오른 걸까. 수영아. 혹시나 해서 말하지만 나는 영화 일을 다시 시작하고 싶은 마음은 없어. 그렇다면 도대체 왜 이런 꿈을 꾸는 걸까. 뭘 두려워하는 걸까. 일어나자마자 일기장에 내가 두려워하는 걸 쭉 적어봤어. 굳이 옮겨 적진 않을게. 두려운 게 이리 많아서 앞으로 어찌 살까 싶더라. 기분이 찜찜해서 이번엔 반대로 내가 좋아하는 걸 적어봤어. 그렇게 나온 게 글을 쓰는 일과 사진을 찍는 일이었어. 그리고 그 순간 너에게 편지를 쓰고 싶었고. 그냥 일기장이 아닌 누군가에게 얘기하고 싶었어. 내가 아직 좋아하는 게 있다고 말이야.ᅠ



나는 매일 해가 뜨고 지는 풍경을 사진 찍는 게 좋아. 길가에 누워 있는 고양이, 골목의 아이들, 열심히 사는 사람들을 글로 쓰고 사진 찍는 걸 좋아해. 파란 하늘을 좋아하는 만큼 비가 오는 하늘도 좋아해. 잎이 풍성한 나무와 겨울에 잎이 해진 나무 역시 같은 마음의 크기로 좋아하고. 나무 아래서 편안하게 쉬는 것도 좋아해.ᅠ

수영아. 이런 건 굳이 잘할 필요가 없는 일이잖아. 나는 좋아하는 일을 더 이상 두려운 일로 만들고 싶지 않아. 가장 좋아한 장소와 사람들이 무서운 모습으로 꿈에 나타나는 걸 원치 않아. 악몽을 꿀 때면 늘 누군가에게 사과해야 할 것 같은 기분이 들어. 그 대상이 같이 일한 사람들인지, 영화인지, 아니면 나인지 잘 모르겠어.ᅠ과연 사과가 가능한 일인지도 의심이 들고. 그래서 지금 내 앞에 있는, 내가 좋아한다고 말할 수 있는 건 지키고 싶어.ᅠ이게 내 직업이 되지 못하더라도 좋아하는 일로 계속 남았으면 좋겠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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