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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리털에 관하여

두려움을 이겨낼 수 있을까-

샤워를 하다 문득

아직 여름을 맞이하지 못한 아이들과 만났다.

다. 리. 털


갑자기 이곳에 나의 털의 이야기를 모두 털어놓자.라는 생각이 들자마자 샤워를 후다닥 끝내고 나왔다.

물기가 뚝뚝 떨어지는 이 순간 급하게 자판을 두드리고 있다.

주변에는 쟤 또 왜 저래. 하는 눈이 6개.



나의 온라인 이름은 토리. 토리의 엄마 도 아니고 토리.

귀엽고 상큼한 이름을 갖게 된 사연은 이렇다

내 고등학교 때 별명이 털이다. 그냥 털.

그것을 가엾이 여긴 친구 하나가 터리 라고 좀 늘려 발음해주었고, 천운으로 토리가 되었다.


그럼 이쯤 되면 털의 상태가 궁금하시겠다.

온몸을 뒤덮고 있는가. 유인원인가?

일단 손가락 두 번째 마디부터 털이 송송 있다.

손등, 팔로 올 수록 밀도는 높아지고 조금 길어진다.

팔찌나 금속 시계는 착용하지 않는다. 그 줄 사이사이에 털이 끼어 아프다.


다행히 가슴, 배에는 없다.


문제는 다리지.


살색 스타킹을 착용하던 그 시절부터 종아리에 나 있는 털은 고민거리였다.

스타킹 밖으로 털이 나오는 건 예삿일이었다.

대강 눈썹 칼로 다리털을 밀었고, 다음날이면 더 빼곡히 자란 다리털을 만날 수 있었다.

문제는 얘네가 점점 더 굵어지고 길어졌다는 점이다.



나는 음.

남의 시선을 굉장히 의식하는 사람이다.

내가 이 말을 했을 때 다른 사람은 어떻게 생각할까?라는 생각을 가장 많이 하는 것 같다.

그냥 노트에 끄적이는 글을 쓸 때와 누군가 자꾸 라이킷을 눌렀다며 알람이 오는 여기에 글을 쓸 때의 느낌은 정말 다르다.

자꾸 썼다가 휘리릭 지우고.

저장을 누르고 나갔다가. 다시 들어와 끄적이고. 이 짓을 며칠 째 반복하는지 모르겠다.

그러다 '다른 사람이 어떻게 생각하는지 알게 뭐람!'이라는 생각으로 뭔가를 써 내려가다가 또 멈칫거린다.


그래.

뭔가 두려운 거야.

욕먹지 않을까 두렵고. 이상한 사람으로 여겨질까 봐 두렵고.

내 밑바닥이 드러날까 봐 두렵고.


그런데 그렇다고 당장 다 뒤집어 까긴 또 망설여진다.

그때! 다리털이 생각났다.

다리털은 나의 치부다. 내 외적인 부분의 최대 컴플스.

이걸 다 드러내면 두려움을 이겨낼 수 있을 것 같다는 느낌이 들었다.



나는 손가락 한 마디 만한 털을 가지고 있어요. 심지어 숱도 많고요.

샤워를 하다 보면 얘네가 미역 같기도 하답니다.

제모크림 광고에 나오는 그 다리랑 비슷해요.

(욕.. 해도 되나요? 갑자기 자괴감이 밀려옵니다.)

발가락 위에도 털이 나서 패디케어는 한 번도 안 받아봤어요.

얘네는 왜 이렇게 자라났을까요. 이렇게 자라는 동안 나는 뭘 하고 있었을까요.



이렇게 쓰면서 이런 걸 쓰는 내가 좀 어이가 없었고, 이걸로 내면의 두려움을 이겨낼 수 있을까 의구심도 들긴 했지만

일단은 발행을 해본다.


그리고 라이킷 알람이 울릴 때마다 머리를 쥐어뜯을 것 같긴 하지만

난 내 치부를 동네방네 다 떠들었어! 이미 새어나간 치부는 더 이상 치부가 아니지!

이제 난 뭘 쓰든 다리털 보다 더 좋은 글을 쓸 수 있을 거야!라고 생각해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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