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letter.B] vol. 11

- 길 위에서 너는 이미 풍요로워졌으니

by 나성훈


Book

이타카


네가 이타카로 가는 길을 나설 때,


기도하라. 그 길이 모험과 배움으로 가득한


오랜 여정이 되기를.


라이스트리곤과 키클롭스,


포세이돈의 진노를 두려워 마라.


네 생각이 고결하고


네 육신과 정신에 숭엄한 감동이 깃들면


그들은 네 길을 가로막지 못하리니.


네가 그들을 영혼에 들이지 않고


네 영혼이 그들을 앞세우지 않으면


라이스트리곤과 키클롭스와 사나운 포세이돈


그 무엇과도 마주치지 않으리.




기도하라, 네 길이 오랜 여정이 되기를.


크나큰 즐거움과 크나큰 기쁨을 안고


미지의 항구로 들어설 때까지,


네가 맞이할 여름날의 아침은 수없이 많으니.


페니키아 시장에서 잠시 길을 멈춰


어여쁜 물건들을 사거라,


자개와 산호와 호박과 흑단


온갖 관능적인 향수들을.


무엇보다도 향수를, 주머니 사정이 허락하는 최대한.


이집트의 여러 도시들을 찾아가


현자들에게 배우고 또 배우라.




언제나 이타카를 마음에 두라.


네 목표는 그곳에 이르는 것이니.


그러나 서두르지는 마라.


비록 네 갈 길이 오래되더라도


늙어져서 그 섬에 이르는 것이 더 나으니.


길 위에서 너는 이미 풍요로워졌으니


이타카가 너를 풍요롭게 해주길 기대하지 마라.


이타카는 너에게 아름다운 여행을 선사했고


이타카가 없었다면 네 여정은 시작되지도 않았으니


이제 이타카는 너에게 줄 것이 하나도 없구나.




설령 그 땅이 불모지라 해도, 이타카는


너를 속인 적이 없고, 길 위에서 너는 현자가 되었으니


마침내 이타카의 가르침을 이해하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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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요일에 책장을 정리하다가 오래 전에 읽은 ‘오 자히르’ 라는 책을 발견했습니다. ‘파울로 코엘료’의 책입니다. 이 작가의 책을 즐겨 읽다가 어느 순간 비슷한 이야기를 반복하는 것 같아서 그만 뒀는데, 오랜만에 다시 만나니 반가웠습니다.


책 도입부에 쓰인 ‘이타카’라는 시. 이타카는 이상향의 구체적인 모습으로 표현되곤 합니다. 매일 현실만 보고 살아서 그런지 이상향과 여행의 이미지가 가득한 이 시가 마음을 울렸습니다. 호메로스가 된 기분입니다.


저는 모험을 즐기지 않습니다. 어떤 길이든 빨리 끝나길 바랍니다. 새로운 걸 배우고 싶긴 하지만 앉은 자리에서 배우고 싶지 롤러 코스터 타듯 인생 길에서 배우고 싶진 않습니다. 어쩌면 이런 태도 때문에 더 힘들어 지는 것 같기도 합니다. 삶은 변화가 기본값이라고 설정하며 살아야 하는지도 모르겠습니다. 라이스트리곤과 키클롭스, 포세이돈의 진노가 두렵습니다. 그것들을 마음에 들이지 않기란 쉽지 않은 일입니다. 마음에 품은 고결한 생각은 밤 사이 날아가 버리고 매일 맞이하는 찬 아침은 다리를 떨게 합니다.


여행자처럼 살 수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요? 책임져야 할 문제가 적은 삶이란 대체 어떤 것일까요? 가벼운 마음으로 시장에서 자기 취향을 만족 시키고, 현자들에게 배우는 삶. 그렇게 유유자적해도 됐던 날이 대체 언제였나 싶습니다. 이런 시를 읽으면 순간 그 시절이, 내게 있었던 그런 날이 떠오르긴 합니다만.


어떤 상황에도 흔들리지 않는 마음의 여유를 가진다면 또 모르겠습니다. 여행자 같은 삶이 가능할지.


‘길 위에서 너는 이미 풍요로워졌으니


이타카가 너를 풍요롭게 해주길 기대하지 마라.’


이 부분에는 상당히 동의합니다. 매일이 주는 풍요로움을 경험하지 못하면 어느 한 순간 찾아오는 쾌락도 그저 말 그대로 한 순간 일 뿐 이상향이 되지는 못합니다. 어떤 일을 성취하거나, 특별한 날이 오면 기뻐할 것이 아니라 매일 기쁘게 사는 훈련을 해야겠습니다. 이타카의 가르침은 이상향을 쫓고 그곳에 도착해서 이루는 것이 아니라 과정 자체에 이상향이 있다고 말하는 것 같습니다. 시처럼 매일을 누릴 수 있다면 참 좋겠네요.


오늘도 별로 이룬 게 없습니다. 동분서주했지만 무력함을 맛 볼 뿐이었습니다. 이런 하루도 쌓이면 인생의 켜를 이루게 될 것이라 믿지만 하루 끝이 좌절스러운 건, 그 파도처럼 좌절감이 밀려오기 때문입니다.


다행히 내일은 내일의 항해가 시작되긴 합니다. 그걸 기대하며 또 빈 배를 띄워야 합니다. 수확이 얼마나 있을지 모르겠네요. 오늘 하루 이미 풍요로워졌으니 특별한 일이 나를 풍요롭게 해주길 기대하지 않는 경지까지 이르고 싶긴 합니다.


이타카를 찾아 떠났지만, 저처럼 좌절한 사람이 있겠죠. 잘 쉬었다가 또 다른 항해 시작하시기 바랍니다. 긴 하루였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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