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 소년은 왜 글쓰기를 그만두었나
어렸을 때 글쓰기를 꽤나 잘 했던 기억이 있습니다. 책읽기를 아침밥 먹는 것 만큼이나 강조하고 강요했던 어머니의 다그침 때문인지, 할머니집 다락방에서 우연히 발견한 외삼촌 노트에 적힌 멋진 문장들에 매료된 덕분인지, 내가 쓴 글은 또래 친구들에 비해 쓸데없이 성숙했고, 의미도 모른체 감성적이었습니다.
초등학교 5학년, 날씨가 여름의 문턱에 걸려 아침마다 긴팔과 반팔 사이를 오락가락하게 하던 애매한 계절의 어느 날, 해양박물관에서 주최한 "바다의 날" 백일장에서 금상을 받았습니다. 상금 30만원을 현찰로 받아 집에 오면서 이 돈을 어떻게 쓸까 한참 고민을 하다가, 당시에 부모님을 대신해 저를 키워주던 할머니에게 상금을 몽땅 드렸습니다.
다리가 불편해서 집밖을 잘 나서지 않았던 할머니는 그 날 온 동네 대문을 두드리며 마실을 다녔고, 손주가 준 용돈을 백만금이나 되는 것처럼 자랑하셨습니다. 그다지 쓸 곳을 찾지 못 했던 나의 글쓰기가 엄마보다도 더 엄마같았던 나의 할머니를 즐겁게 해 줄 수 있다는 사실이 기쁘기도 하고, 신기하기도 했습니다.
6학년 겨울에는 한참 시 쓰기에 골몰했습니다. 소설은 지루했고, 수필은 없어 보였습니다. 시는 심플하면서도 멋이 있었습니다. 무엇보다도 시 한 편을 쓰는데는 시간이 많이 걸리지 않는게 좋았습니다. 5분, 10분이면, 완성된 글이 한 편씩 쏟아지니 손도 편하고, 머리도 편했습니다. 그러던 어느 날, 집에 컴퓨터와 프린터가 생겼습니다. 노트에 적어 놓았던 여러 편의 시들을 한글 파일로 옮겨 적고, 컬러로 출력해서 벽 여기저기에 덕지덕지 붙이는 재미가 쏠쏠했습니다.
그 중에 "첫눈"이라는 제목의 자작시가 있었는데, 그 시가 그렇게 명작이었나 봅니다. 다른 지방에서 일을 하느라, 주말에만 집에 들러 아들과 시간을 보냈던 어머니는 주말마다 벽에 붙은 그 시를 보며 "우리 아들 시를 정말 잘 쓴다."는 칭찬과 함께 엄마랑 떨어져 살아서 미안하다며 눈물을 흘렸습니다. 그 후로, 나는 내가 정말 시인이라도 된 것처럼 무던히도 열심히 시를 썼습니다.
제가 들어간 중학교에는 쉰이 넘은 국어선생이 한 분 있었는데, 그 지방에서 꽤나 유명한 시인이라고 했습니다. 엄청난 거구에 까맣게 그을린 피부. 입도 거칠고, 숨소리도 거칠고, 손짓 발짓 하나하나고 거칠고 무서웠던 그 선생은 시인보다는 어느 부락의 촌장에 더 어울리는 사람이었습니다. 워낙에 시골인지라 시인이라는 타이틀만으로도 뭔가 특별한 권위가 부여되었는지 여기저기에서 인사하러 오는 이들도 많았고, 인근에서 백일장이 열리는 날에는 심사위원으로 초빙되어 국어시간이 자습시간이 되는 날도 종종 있었습니다.
어느 날, 그 선생이 나를 포함해 3명의 아이를 교무실로 불렀습니다. 조만간 서울에서 백일장이 열리는데, 너희 셋이 참가할거라고 했습니다. 나야 뭐 평소에 글쓰기도 좋아하고 이전에 상도 받은 적이 있던 터라 그 선생의 픽을 받은 게 나름 당연하다고 생각했는데, 나머지 두 친구는 다소 의아해하는 눈치였습니다. 그렇다고, 그 무서운 촌장에게 이유를 묻거나, 싫다고 대꾸 할 수 있는 용자는 없었습니다. 아이들의 부모 또한 지엄한 촌장에게 이유를 묻거나, 싫다는 대꾸없이 (여행경비 치고는 과하게)두둑한 노자돈 봉투를 선생에게 전달하며 1박 2일의 서울 여행을 떠나 보냈습니다.
서울에 도착한 이튿 날, 우리는 백일장이 열리는 마로니에 공원에 도착했습니다. 당시, '칵테일 사랑' 이라는 노래가 엄청 유행했었는데, 그 가수 이름이 마로니에인줄만 알았지, 마로니에 공원이 있다는 건 처음 알았습니다. 공원 한 켠에 나와 비슷한 또래와 형님뻘 되는 학생들이 몰려 있었는데, 어색한 웅성거림을 30분 정도 참고 기다리니, 양복 입은 아저씨들이 나와 백일장 주제어가 적힌 종이를 벽에 붙였습니다. 키 작은 우리가 가까스로 무리의 앞으로 기어나와 주제어를 확인한 찰나, 선생은 우리를 끌고 공원 뒷편 까페로 가 자리를 잡았습니다.
제한 시간은 3시간, 나름 큰 돈 써가며 서울까지 왔으니 제대로 실력을 보여주고 싶었습니다. 그런데 왠일인지 머리 속이 하얘지면서 아무 것도 쓸 수가 없었습니다. 주제어를 바꿔가며 시를 쓰려고 시도해 보았지만 1시간이 지나도록 원고지는 텅텅 비어 있었습니다. 시간이 흐를수록 가슴은 답답하고 손에 땀이 났지만, 여전히 시상은 떠오르지 않았습니다. 뒤늦게 '바다의 날' 영광을 떠올리며 수필로 방향을 틀어보았지만 시간이 턱없이 부족하다는 걸 깨닫고 앞이 막막했습니다.
나의 이런 초조한 심경을 아는지 모르는지 국어 선생은 내내 원고지에 뭔가를 열심히 적고 있었는데, 종료 시간을 20여분쯤 앞두고 갑자기 우리 셋에게 자신이 적은 원고지를 하나씩 던지며 베껴 적으라고 했습니다. 셋 중 누구도 여전히 이유를 묻거나, 싫다고 대꾸할 용기가 없었기에 선생이 두껍고 거친 손에 조그만 티스푼을 걸치고 아이스크림을 떠 먹는 동안 우리는 열심히 배껴 적었고, 종료 시간에 맞춰 심사위원에게 베껴 쓴 원고지를 제출했습니다. 셋 중 한 아이가 장려상을 받았습니다.
기차를 타고 집으로 돌아오는 내내 기분이 몹시 불쾌하고 서러웠습니다. 글쓰러 서울까지 와서 아무것도 쓰지 못한 내가, 선생의 부정행위에 묵묵히 동조한 내가, 그러고도 아무런 타이틀도 얻지 못 하고 돌아온 내가 무척이나 한심스럽고 바보같이 느껴졌습니다. 당시에는 그냥 속상함이었는데, 시간이 좀 흐르고 보니 그 사건은 나에게 상당한 트라우마가 되었던 것 같습니다. 그 이후로 나의 글쓰기는 시들해졌고, 어떤 글쓰기 대회에도 신청을 할 용기가 나지 않았습니다. 더 이상 할머니에게 상금으로 용돈을 준 일도, 자작시로 어머니를 감동시킨 일도 없었습니다.
어느 새 저는 39살이 되었고, 두 사내아이의 아빠가 되었고, 12년차 직장인이 되었습니다. 불혹의 나이라는 마흔을 겨우 1년여 남겨둔 이 시점에 지난 삶을 돌아보니, 나는 마로니에 공원에서의 부끄러운 기억은 온데간데 없이 여전히 수도 없이 많은 글을 쓰고 있었습니다.
중3때 능력도 없이 떠밀려나간 수학 경시대회에서 답안지에 숫자 대신 "나는 간다. 수면 위를 물수제비 뜨는 이름모를 돌맹이처럼 나는 간다."로 시작하는 시를 한 편 쓰고 나왔는데 자살징후가 보인다며 교육청에서 특별관리 명령이 내려와 교무실로 불려가 반성문을 썼습니다. 자살징후가 보인다면서 심리상담이 아니라 왜 반성문을 쓰라고 했는지는 잘 모르겠습니다.
대입논술 시험에서는 1등으로(점수 말고 스피드로) 답안지를 제출하고 나와 내 학교가 될지 어떨지도 모르는 눈덮인 교정을 혼자 거닐며 속으로 '나 ㅈㄴ 멋있는데?!' 망상에 빠지기도 했고, 프문예(프랑스 문화/예술) 교양 과목의 기말 과제로 반고흐에 빙의하여 가셰 박사를 욕하는 시를 쓰기도 했습니다.
회사에 들어와서는 수도없이 많은 이메일을 셀 수 없이 많은 사람들과 주고 받으며 일머리를 키웠고, 유럽으로, 동남아로, 호주로 가족 여행을 다니며 현지에서 받은 감동과 감회를 시로 적어 사진과 함께 앨범으로 만들어 두었습니다. 지칠 때, 한번씩 열어보며 즐거웠던 추억을 되살릴 수 있도록이요.
코 풀때 뽑아 쓰는 휴지처럼, 샤워할 때 눌러 쓰는 샴푸처럼, 그저 필요할 때 꺼내 쓰는 일회용품같은 글쓰기였지만, 한 편으론 지나온 삶을 꾸준히 연명시켜 준 생필품같은 글쓰기이기도 했습니다. 그래서 다시 글쓰기를 조금 진지하게 대해 보고 싶어졌습니다.
앞으로도 여전히 글쓰기로 상금을 받을 일도, 어머니를 감동시킬 일도 없겠지만, 가장으로서, 직장인으로서 치열하게 살아온 지난 삶과 더욱 치열할 앞으로의 삶을 정리하고 추억하고 공유할 수 있는 유일한 수단은 글쓰기뿐이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벌써 청년을 지나 장년을 향해 가고 있는 몸이지만, 마음 속 깊은 곳에 숨죽이고 숨어 있을 소년의 감수성을 끄집어 내어 다시 글을 쓰고 싶어졌습니다. 때론 추억을, 때론 계획을, 때론 조언을, 때론 감성을 하나둘 예쁜 글로 표현해 보고 싶어졌습니다.
마침.