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워킹대드 Working Dad Mar 24. 2021

스타트업에 없는 것, 시스템

필연적으로 혹은 의도적으로 시스템이 없는 게 스타트업의 "찐" 매력

스타트업으로 처음 이직한 경력자들이 하나같이 하는 이야기가 있습니다.


"시스템이 없다."


시스템이 없다는 건, 문제 해결 과정에서 커뮤니케이션을 하고 의사결정을 하고 액션을 취하기 위한 '정해진 규칙' 또는 '프로세스'가 없다는 말인데요, 경험해 보지 않은 분들은 이게 무슨 말인지 잘 이해가 안 될 수도 있을 것 같아, 비유를 해 보자면 이렇습니다.





지금부터 당신은 군인입니다.


전투력 강하고 용맹하기로 소문난 어느 부대에서 유능한 군인으로 인정받던 당신은 전쟁이 한창인 어느 지역의 게릴라 부대에 스카우트되었습니다.


부대 출근 첫날 아침부터 전투가 벌어졌고, 부대원들은 각자 총을 챙겨 뛰어 나갑니다.


당신도 전투에 참여해야 할 것 같아, 옆에 있던 동료에게 내 총은 어디 있냐고 물으니, 무기고에 가서 찾아보라고 합니다. 무기고는 어디 있냐고 물으니, 작전실 옆에 있다고 합니다. 작전실은 어디 있냐고 물으니, 짜증 섞인 말투로 본인은 지금 나가봐야 하니 알아서 찾아보라고 합니다.


물어물어 무기고에 들어와 보니 멀쩡한 총은 하나도 없고, 여기저기 분해된 부품만 나뒹굴고 있습니다. 총신, 개머리판, 탄창 등을 주워 모아 어찌어찌 총의 모양새를 만들어 뛰어 나가 열심히 전투에 임합니다. 이런 총도 총알이 나갈까 싶었는데, 몇 발 쏴보니 정확도는 좀 부족하지만 나름 쓸만하다는 사실이 놀랍습니다.


어느덧 저녁때가 되었고 마침 전투도 소강상태라 식사를 해야 할 것 같습니다. 하루 종일 옆에서 같이 싸우던 동료에게 전투식량이 어디 있냐고 물으니, 그런 거 없다고 합니다. 그럼, 식사를 어떻게 해야 하냐고 물으니, 또 짜증 섞인 표정과 함께 "경력도 있는 사람이 징징거린다."고 그런 건 알아서 좀 하라고 핀잔을 줍니다. 저만치에서 고기를 구워 먹는 일행이 있어 염치 불고하고 갈빗대 하나를 얻어먹으며, 이 부대에는 취사병이 따로 없냐고 물으니 자기들도 이 부대에 온 지 며칠 안되어서 잘 모르겠다고 합니다.


갈빗대를 한입 뜯어 문 순간, 전 부대원 작전실로 집합하라는 대장의 명령이 떨어집니다. 대장은 오늘 있었던 전투에 대한 전반적인 리뷰를 하고, 내일은 어떤 전략으로 싸울지 계획을 설명합니다. 그때, 저 끝에 있던 스무 살을 갓 넘긴듯한 어린 부대원이 반론을 제기하고 자신의 전략을 이야기합니다. 대장이 좋은 생각이라고 칭찬합니다. 이번에는 반대편에 있던 나이 지긋한 부대원이 다른 의견을 제시하고, 대장은 또 좋은 의견이라고 박수를 치고는 다들 피곤하니 이만 해산하자고 합니다. 갑분해산에 놀란 당신은 그래서 내일 전략은 무엇으로 할 거냐고 물으니, 그건 내일 전투가 일어날지 안 일어날지 모르니 상황 보고 결정하자고 합니다.


개울물에 대충 세수만 하고 침상에 누웠는데, 뭔가 께름칙합니다. 아! 개울에서 막사로 돌아오는 길에 보초병을 한 명도 보지 못했습니다. 눈이 반쯤 감긴 옆자리 동료에게 보초는 누가 서냐고 물으니, 보초병은 따로 없고 자다 깨서 화장실 다녀오는 사람이 주변을 둘러보고 문제가 있으면 알려준다고 합니다. 불안한 마음도 잠시, 첫날부터 전투를 치르느라 몹시 피곤한 당신은 본인도 모르게 잠에 빠져 들고, 새벽에 잠깐 화장실에 다녀오는 길에 주변을 휙휙 둘러보고 아무 일 없음에 안심하며 다시 잠자리에 듭니다.

 



스타트업에 '시스템이 없다'는 것... 대충 이런 느낌인데, 제가 받은 그 느낌적인 느낌이 잘 전달이 되었을지 모르겠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제가 스타트업을 좋아하는 이유는 시스템은 부족할지언정, 적어도 싸워야 할 '적'이 분명하고, 쉽게 포기하지 않고, 쓸데없는데 돈 낭비/시간 낭비를 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정치질에, 내분에, 탁상공론에, 책임 떠넘기기에... 안에서 자기들끼리 싸우느라 바빠서 게릴라군이 쳐들어오는지도 모르는 적군이라면, 그 규모가 아무리 크고 엄청난 화력으로 무장했더라도 스타트업의 끊임없는 도전에 머지않아 무너지고 말 것입니다.


 

designed by Freepik

매거진의 이전글 내가 K-스타트업 떡상한다고 했제?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