저항정신 + 영웅주의 + 실험정신
지난 2년여 시간 동안 기업의 인재채용을 지원하는 채용비즈니스를 기획하고, 개발하고, 운영하면서 참 많은 스타트업 대표들, 공동 창업자들, 인사 담당자들을 만나고 대화를 나눴습니다. 그 중에는 이제 갓 팀을 꾸린 4~5명 정도 규모의 스타트업도 있었고, 이미 스타트업이라고 부르기 어색할 정도로 규모가 큰 유니콘 기업도 있었는데요, 흥미로웠던 건 제가 만난 거의 모든 사람들이 규모가 크건 작건 '우리 회사가 스타트업이라는 것'에 대한 자부심과 애정이 넘쳐 난다는 점과 직원 수가 이미 몇 천명이 되는 회사도 여전히 자신의 회사를 스타트업으로 불러주기를 희망한다는 점이었습니다.
그러다 문득, '스타트업은 다른 형태의 사업과 무엇이 다른가?', '무엇이 그토록 이들을 스타트업이라고 불려지고 싶게 하는가?'라는 질문을 마음 속으로 하게 되었고, 스타트업에 대한 다양한 아티클과 제가 인터뷰했던 내용들을 다시 읽으며 제 나름의 답을 찾아 보았습니다.
저는 이렇게 찾은 스타트업만의 차별성에 "스타트업을 탄생시킨 3개의 기둥"이라고 이름을 붙여 보았는데요, 이 글을 읽는 스타트업 대표님들, 재직자분들이 있다면, 제 생각이 여러분의 생각과도 유사한지 피드백을 주시면 좋겠습니다.
먼저, 스타트업은 기득권이 만들어 놓은 규칙과 관습에 대한 저항에서 비롯합니다. 이와 같은 저항정신은 '제도화된 사회에서 획일성을 강요받으며 남들과 똑같이 사는 것'에 알러지 반응을 일으키는 밀레니얼 혹은 MZ 세대의 반항심이면서, 동시에 눈꼽만큼 작은 블루오션마저도 게걸스럽게 먹어치우려고 애를 쓰는 글로벌 대기업들의 횡포에서 살아남기 위한 생존전략이기도 합니다.
심리적으로든 물리적으로든 나를 불편하게 하는 것들을 참지 못하고, 효율성과 권력을 등에 엎고 활개 치는 사회 부조리와 모순을 두고 보지 못하는 이들이 시공을 초월하는 IT 기술과 자본주의의 응원을 무기로, 문화를 바꾸고, 사회를 바꾸고, 경제를 바꾸려는 시도가 바로 스타트업입니다.
1990년대에 불었던 벤처붐을 기억하실텐데요, 제 개인적인 견해로는 벤처기업과 스타트업을 구분하는 가장 근본적인 기준이 이 '저항정신'이라고 생각합니다. 벤처 또한 스타트업과 마찬가지로 IT 기술을 기반으로 새로운 비즈니스 기회를 획득하고 경제적 가치를 창출하려 했던 것은 동일하지만, 그 비즈니스를 통해 사회적 모순과 비효율을 제거하겠다는 목표의식이 강하게 드러나지는 않았던 것 같습니다.
스타트업을 시작하는 사람들은 저항정신에 더해 '영웅주의' 의식을 가지고 있습니다. 말인 즉슨, 지금 내가 경험하고 느낀 이 문제를 해결할 수 있는 사람은 다른 누군가가 아닌 '내'가 되어야 한다는 생각을 가지고 있다는 것입니다.
내가 가진 아이디어로, 내가 가진 자금력으로, 내가 가진 네트워크로 이 문제를 해결하고, 사회 문제를 바로 잡고, 산업 지도를 바꾸고 싶다는 강한 열망이 돈을 모으고 사람을 모으고 판타지같은 영웅소설의 첫 페이지를 현실로 옮겨 옵니다.
새로운 사업을 시작한다는 것은 엄청난 용기가 필요한 일입니다. 익히 들어서 아시는 것처럼, 한 해에도 수많은 사람들이 직장을 그만두고 자영업을 시작하기도 하고, 뜻 맞는 사람들이 모여 새로운 사업을 시작하기도 합니다. 하지만, 그 중에 성공하는 사람은 전체의 10%도 되지 않습니다. 그래서 여전히 수많은 직장인들이 담배타임에, 식사중에 매일같이 창업 아이템을 이야기하면서도 막상 실천에 옮기는 사람이 많지 않은 이유이죠.
영웅주의는 보는 이에 따라 사명감으로 비춰질수도 있고, 과도한 자기애로 보여질 수도 있는데, 정작 그들은 그들의 모습과 행동이 타인에게 어떻게 보여지는지 중요하게 생각하지 않습니다. 타인의 시선이나 새로운 도전에 대한 두려움보다 맞서 싸우지 않아서 감당해야 할 위험이 더 크다고 생각하기 때문에 눈치보지 않고 행동에 옮깁니다. 마블 시리즈에 등장하는 히어로들이 지구를 지키기 위해 매번 미지의 적들과 용감히 맞서 싸우는 것처럼요. 얘기해 놓고 보니, 테슬라의 엘론 머스크가 아이언맨의 모델이라고 한 것도 우연은 아닌 것 같습니다.
스타트업을 탄생시키고, 또 유지하게 하는 마지막 3번째 기둥은 '실험정신'입니다. 저항정신과 영웅주의로 시작한 스타트업이 정치적 프로파간다가 아닌 경제 주체로 발현된 것은 자신의 아이디어와 솔루션이 무조건 정답이라고 우기지 않는 개방성과 수용성 때문이라고 생각합니다.
그 아이디어는 스타트업을 시작하게 된 일종의 마중물일뿐, 급속도로 발전하는 IT 기술과 종잡을 수 없이 변화하는 고객(유저)의 니즈 앞에서 어제의 성공요인이 오늘의 실패요인이 될 수 있음을 스타트업은 태생적으로 알고 있습니다. 본인 스스로가 그러한 변곡점에서 생겨났으니까요.
그래서 이들은 머리를 맞대고 정답을 찾는 지리멸렬한 탁상공론 대신에 빠르게 '실험'을 합니다. 생각나는 것, 좋아보이는 것, 별 문제 없을 만한 것들은 왠만하면 실행해 보고 결정을 합니다. 그러다가 기존의 아이디어보다 결과가 더 좋은 무언가를 발견하게 되면 거리낌없이 사업을 확장하거나 아예 업종을 변경하기도 합니다. 스타트업 업계에서 흔히 말하는 '피봇'의 개념인데요, 스타트업은 산업이든, 솔루션이든, 조직문화든 언제든 더 좋은 것이 나타나면 피봇을 할 준비가 되어 있고, 더 좋은 것은 항상 '실험'을 통해 검증합니다.
최근 한국의 많은 스타트업들이 OKR제도나 Agile 프로세스, Squad 조직 등, 실리콘밸리에서 시작된 다양한 조직운영 체계를 도입하는 것을 두고, 일부 HR 담당자나 기업문화 전문가들이 '그건 구글이니까 되는 거다.' '한국 사회와는 맞지 않다.' '남들이 좋다고 하면 따라하려는 잘못된 습성이다.'와 같은 우려의 목소리를 내는데, 저는 이런 의견을 접할 때마다 이 분들이 스타트업에 대해 잘 알지 못한다는 생각이 듭니다.
스타트업은 OKR도 Agile도 Squad도 절대신봉하지 않습니다. 지금까지 발견되고 발명된 아이디어 중에 가장 합리적이고 도움이 될 것으로 판단되기 때문에, 일단 가져와서 우리 회사에 맞는지 아닌지 실험 중일 뿐입니다. 실험 결과, 남들이 다 좋다고 해도 우리한테 맞지 않다면 과감하게 버릴 수도 있고, 잘 맞는 부분만 골라낸 다음 새로운 아이디어를 덧붙여 독자적인 모델을 만들어 낼 수도 있습니다.
그래서 저는 자신하건데, '그건 구글이니까 되는 거다.' '한국 사회와는 맞지 않다.' '남들이 좋다고 하면 따라하려는 잘못된 습성이다.'와 같은 생각은 모두 틀렸습니다. 구글도 시작은 작은 스타트업이었고, 우아한형제들/하이퍼커넥트/쿠팡 등의 한국 토종 스타트업들은 글로벌 IT 기업들과 어깨를 나란히 하고 있으며, 스타트업 세계관에서는 남들이 좋다고 하는 걸 따라하지 않는 게 오히려 바보입니다. 먹어보고 맛 없으면 뱉으면 되는 것을요.
글을 쓰고 나서 보니, 마치 제가 스타트업 신봉자 내지는 찬양론자로 보이는 것 같은데요, 스타트업 문화와 정신을 좋아하고 아끼지만, 그렇다고 모든 스타트업이 좋은 기업이라고 생각하지는 않습니다.
스토리텔링을 위해 가짜 저항정신을 들먹이는 돈벌레, 어긋난 영웅주의로 사회적 혼란을 더욱 가중시키는 과대망상증 환자, 초기의 실험주의는 온데간데 없고 자신의 생각이 곧 정답이라는 독재자 등... 스타트업이라고 부르기 어려운, 껍데기만 스타트업인 회사들도 더러 있습니다. (주로, 대표들이 문제인 경우가 많죠.)
하지만, 제가 믿는 건 역사상 유례없이 강력해진 대중의 힘이 거짓과 탐욕과 독선 위에 세워진 기업을 가만히 두지 않을 것이라는 점입니다. 모든 생태계가 그렇 듯, 스타트업 생태계 또한 오염물질과 생태교란종은 생겨나게 마련이고, 이 것들을 제거하기 위한 자정작용 또한 알아서 생겨날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