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상할 수 없던 순간에 발생한 치욕을 도저히 견딜 수 없다. 나의 머리로 헤아릴 수 없는 상황을 도대체 어떻게 받아들여야 하나. 사실관계에 입증한 결과로 받아들이기 위해서는 피하고 싶은 상황을 맞닥뜨려야 하는데, 그보다는 그냥 흘려보내는 것이 낫다는 생각이다. 이렇다 할 명확한 피해가 없는 나의 정신적인 고통에 불과한 상황을 그저 하나의 우연한 사건으로 받아들일 수만 있다면, 세상 모든 일들이 더할 나위 없이 쉬운 수준으로 변하지 않을까.
모든 사실을 입증하려 했던 나의 사실주의적 행동 패턴은 더 이상 아무것도 입증하지 못할 정도로 넓어진 세계에 압도당했다. 그저 무엇이 중요한지 스스로가 인지할 수만 있다면 자잘한 파도들은 무시하여도 되겠다는 게 지금의 자세이다. 아, 그저 한 글자씩 적어나가는 이 기계적인 행위가 나를 위로할 뿐이다.
달릴 수 있어서 다행이다. 호흡이 넘쳐 올라 죽을 것만 같은 고비들을 넘고 나면 길바닥에 쓰러져 내 세상인 것 마냥 아무 생각이 들지 않는다. 그렇게 일상에서 생긴 작은 균열들이 매워져 간다. 참 별 것 아닌 일에 목숨 걸고 살았던 순간들이 유치해지면서도 그러한 순간에 다시금 다이빙하는 바보 같은 모습들. 덕분에 나는 꾸준히 달릴 수밖에 없다. 내가 나약하고 개선해야 할 인간이라서 다행이다.
와장창 깨진 것 아니다. 단지 균열이다. 그저 예측 못할 바람이 불어와 머리칼을 흩날렸다고 생각하면 그만이다. 작은 균열이 나의 세계를 뒤흔들지 못할 만큼 단단해지거나 유연해지거나. 그렇게 살아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