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이태리 Aug 24. 2020

사과는 말이 아니라 행동으로 보여주는 것!

뮤지컬 <마리 퀴리> 리뷰_ 2020.08.23 관람

미안해..

돌이켜보면 이 세 글자의 말처럼 아무런 힘이 없는 단어가 있을까? 사람들은 잘못을 저지르고 누군가에게 용서를 구하고자 할 때 저 말을 사용한다. 물론 용서는 신만이 하는 것으로 인간에게 용서를 구한다는 것 자체가 이치에 맞지 않지만, 인간에 대한 예의와 최소한의 책임 의식을 위해서라도 피해자에게 적절한 사과는 표해야 한다. 그런데 과연 미안하다는 말 한마디가 자신의 과오를 씻어줄 만큼, 또는 피해자의 상처를 아물게 할 만큼 힘을 갖고 있는지 의문이 든다.

동료들의 죽음의 원인이 라듐이라는 진실을 알고 항의를 하러 간 '안느 코발스키'(이봄소리 분)가 라듐 공장 대표와 함께 있는 '마리 퀴리'(옥주현 분)를 봤을 때 느꼈을 당혹감의 무게는 얼마나 되었을까? 당장 이곳을 떠나 진실을 밝히자는 자신의 제안을 거절한 마리를 보며 느꼈을 배신감은 또 어떠할까? 마리에게도 불치병 환자들을 살리기 위한 행위였다는 나름의 사정이 있었지만, 사실 인간에게 남의 사정은 그리 중요하지가 않다. 본래 내 손에 박힌 가시가 남의 암보다도 더 아픈 법으로, 그 순간에 안느는 가장 친한 친구가 믿음을 깨버린 충격에 아무것도 보이지 않았을 것이다.


마리는 홀로 진실을 밝히겠다고 선 안느 앞에 나타나 눈물의 사죄를 한다.


미안해..


구구절절한 세레나데와 함께 둘은 화해를 맞이하지만, 나는 단언할 수 있다. 안나의 상처는 아물지 않았다. 미안해라는 말은 힘이 없기 때문이다. 미안하다는 말 한마디에 죽은 동료들이 살아 돌아올 것도 아니고, 자신을 버리고 공장 대표 곁에 선 그날에 마리의 선택이 달라지지도 않는다.  마디로 미안하다는 손쉬운 사과의 말로 있던 일이 없던 일이 되는 것은 아니다.



사과는 말이 아니라 행동으로 하는 것이다. 어떤 일로 누군가에게 상처를 주었다면 그 어떤 일을 반복하지 않으면 된다. 그 어떤 일이 다시금 떠오르지 않도록 노력하면 된다. 위로는 절대 가벼운 말 따위가 만들어주지 않는다. 누군가의 상처 받은 마음은 오로지 돈과 시간만이 위로해줄 수 있다. 인간의 에너지와 시간이 담긴 돈과 또다시 과오를 범하지 않으려는 노력이 담긴 시간만이 위로를 안겨줄 수 있다. 이 모든 것은 인간의 행동으로 결국 위로는 말이 아닌 행동으로만이 가능해질 수 있다.


예전에 한일 위안부 협상이 이루어졌다가 피해 할머니들의 반대에 결국 무산된 일이 떠오른다. 할머니들의 상처를 아물게 하기에는 일본이 보여준 돈과 시간이 터무니없었다. 10억 엔이라는 돈으로 절대 그 참혹했던 상처를 보상받을 수 없다. 무엇보다 과오를 인정하지 않고 지속적으로 지난날의 상처를 떠올리게 하는 망언들을 통해서 온전한 치유의 시간을 주지 않았다. 혹자는 가해자가 피해자에게 언제까지 사과해야 하냐고 반문하기도 한다. 너무 당연해서 일러주기도 입이 아프지만, 피해자가 원할 때까지 가해자는 사과해야 한다고 확언한다. 그렇다고 매번 행동으로 사과할 것도 아니면서, 인간은 그 가벼운 말 한마디조차 평생 해주기를 귀찮아한다. 참 어리석고, 모자라다.



다시 공연으로 돌아오면, 마리는 안느에게 속죄라도 하듯 한 평생을 라듐을 연구하며 수많은 불치병 환자들을 살려내는 데에 공헌한다. 죽음을 앞둔 마리에게 편지를 타고 나타난 안느는 마리의 사과를 진정으로 받아들이고, 그제야 진정한 화해가 실현된다. 공연의 마지막 장면에서 안느의 상처는 치유되고 마리의 죄책감도 사라지게 된다. 둘의 화해가 이루어지기 위해 마리는 한 평생을 노력했다. 자신의 사죄의 행동을 빈틈없이 채운 시간을 안느에게 안겨주었기에 가능한 일이었다. 마지막 장면이 아름다운 까닭은 자신의 실수를 바로 잡으려는 마리의 안간힘과 그의 진심을 너그럽게 받아들이는 안느의 포용에 있다.


사실 뮤지컬 <마리 퀴리>는 약점이 너무 많은 극이다. 대극장을 꽉 채우지 못하는 퍼포먼스와 앙상블, 주인공의 주체성이 부각되지 못하는 느슨한 내러티브 등, 정말이지 1막은 스타 옥주현의 세레나데밖에 볼 게 없을 정도로 형편이 없다. 주인공 마리의 주체성이 더욱 드러나도록 프랑스 대학에서 고군분투하는 서사가 더 박진감 있게 그려졌어야 하며, 안느의 동료들의 비애감을 강조하고 싶었다면 1막에서부터 그들의 서사가 더 촘촘하게 설계되었어야 했다. 2막에서 갑작스럽게 안느와 동료들의 비극성이 드러나다 보니, 공감보다는 느닷없음에 당혹스러웠다.


그럼에도 커튼콜에 기립박수를 칠 수 있었던 것은 마지막 그 아름다운 장면이 있었기 때문이다. 수많은 약점도 커버할 수 있을 만큼, 한 사람의 최선을 다한 사과와 용서는 울림을 준. 미안하다는 말은 힘이 없지만, 미안하기 때문에 하는 행동은 힘이 세다. 자신의 과오를 알고, 똑같은 실수를 반복하지 않으려고 행동하는 사람은 감동을 줄 수 있다. 미안함을 가슴에 담고 열심히 살아가 보기를 다짐한다. 언젠간 나의 안느가 나를 찾아와 포용해 주는 순간을 꿈꾸며 하루하루를 살아가보려 한다.     

매거진의 이전글 그래도, 가족은 힘이 세다!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