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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태리 Aug 06. 2020

'어쩌다' 공연이 된 이유

대학로에 대한 아주 개인적인 고함

내가 처음 혜화동을 방문하였을 때가 생각난다. 어느 이름 모를 연극을 보았던 것 같은데, 연극 내용은 생각나진 않지만 그날에 대학로 분위기는 생생하게 기억난다. 대학로에는 연극을 보러 가는 사람들의 설레임이 있었고, 공연을 하는 예술인들의 열정이 넘쳐났다. 파전 굽는 냄새와 젊은이들의 시끌벅적함이 이질적으로 공존하는 것이 뭔가 오묘하게 어울렸다. 아날로그의 정취 속에서 청춘의 열기 같은 것이 피어오르는 느낌이랄까? 나는 단숨에 혜화동 풍경에 매료되었다.

나의 꿈을 처음으로 펼쳤던, 어린 시절 내 삶의 터전이었던 혜화동은 이제 너무도 많이 변했다. 아담한 소극장들은 사라지고, 그 자리에 번쩍번쩍한 빌딩들이 들어섰다. 파전 냄새나던 정겨운 막걸릿집을 이제는 프랜차이즈 술집들이 대신한다. 대학로의 변화의 물결은 단지 외관만을 바꾼 것이 아니라 공연에 까지 영향을 주었다. 대학로의 공연들도 돈이 되는 상업극만이 무대에 오른다. 작은 규모의 창작집단이 만드는 창작극이나 실험적 공연들은 주변부로 밀려나더니 이제는 찾아보기 힘들 정도로 귀해졌다.


자본의 논리는 대학로에서 나름 명맥을 유지했던 창작 작품에까지 영향을 미쳤다. 웰 메이드 창작극은 더 이상 웰이 아니었다. 수익을 극대화하기 위해 오픈런으로 상시 공연했고, 더 적은 페이를 줄 수 있는 어린 배우들을 무대에 세웠다. 시간과 경험이 부족한 공연이 질이 떨어지는 것은 순리였다. 연출적인 면에서도 대중적 코드를 적극 반영하여, 내용과 분위기 역시 기존 상업극과 별반 다를게 없어졌다. 내가 오랜 시간 좋아했던 어느 뮤지컬도 한없이 가벼워진 극과 깊이 없는 표현으로 과거에 살아 숨쉬었던 예술적 영감을 잃었다. 변하지 않고 감흥을 주는 건 오직 넘버밖에 없었다. 동경했던 작품이 망가져가는 모습을 지켜보는 일이란 참으로 씁쓸하다.      


또 하나의 변화는 덕후들의 탄생이었다. '뮤덕', '연덕' 등 특정 작품이나 배우, 아니면 뮤지컬과 연극 자체에 큰 관심을 가지고 대학로에 상주하다시피 공연을 보는 이들이다. 내가 공연을 할 때부터 연뮤덕 문화가 형성되기 시작했는데, 그때와 지금의 문화는 큰 차이가 있다. 내 작품에도 캐스팅별로 여러 차례 공연을 보러 오는 관객들이 있었는데, 그들이 공연을 즐기는 문화는 상당히 조심스러웠고 배려심이 있었다. 무던하게 공연을 즐겼고, 자신의 감상은 함께 온 친구와 공유하거나 온라인 공간에서 표현하는 것이 전부였다. 좋아하는 배우를 향한 표현도 혹여 배우가 힘들까봐 공연이 끝나고 사진 촬영하는 순간에 무난하게 이루어졌다. 순수했고, 고마운 문화였다.


그랬던 덕문화가 차츰 과감해지더니 지금에 이르러서는 유난스러워지고, 무엇보다 폭압적으로 바뀌었다. 언젠가부터 '퇴근길'이라는 문화가 생겨, 공연이 끝나면 연뮤덕은 집엘 가지 않고 공연장 앞에 진을 쳤다. 공연이 끝나고 집에 가는 배우를 붙들고 포토 타임을 하고, 선물 증정식을 하고, 얘기를 주고받고, 마치 그들만의 에필로그를 찍는 것 같았다. 개인적으로 배우는 무대 위에서나 배우라는 생각을 해서, 무대 밖에서까지 배우의 태도를 요구하는 그 문화는 생경하고 보기 불편하다. 그러나 타인들의 문화이기에 존중한다. 문제는 그들만의 문화가 정도를 넘어서 다른 사람의 문화를 침범한다는 사실이다.


십분 남짓했던 퇴근길 행사는 어느새 단막극만큼의 분량이 되었다. 극장이라도 대관하는 걸 추천하고 싶다. 또한 친구나 온라인 상에서 공유하던 개인적 감상을 이젠 배우에게 직접 전달하는 사태까지 일어난다. 어제 공연이 감정이 더 좋았네, 오늘은 대사를 절었네, 동선이 달라졌네 등 훈수를 두기 시작했다. 여러 번 공연을 보다 보니 조금의 변화에도 민감하게 반응하고 문제를 삼는다.  정말이지 실황성이라는 공연의 본질을 이해하지 못하는 참견이다. 문제는 이러한 말에 배우가 흔들리고, 공연에 영향을 줄 수도 있다는 사실이다. 물론 대중의 귀한 감상평으로 받아들일 수도 있지만, 공연을 처음 본 관객들에겐 하등 문제가 되지 않을 꼬투리일 뿐이다.  


그들의 참견은 과감해져 다른 관객들을 향하기 시작한다. 다른 관객은 이들의 의견을 수용할 아무런 의무가 없는데도 말이다. 얼마 전 배우 손석구와 몇몇 배우들의 '관크'(관람을 방해하는 해위) 논란이 일어난 적이 있었다. 손석구가 공연을 관람하는 와중에 연뮤덕의 관람을 방해했다는 고발성 글이 올라왔다. 그 고발의 요는 공연을 보면서 마른기침을 하고, 트림을 하고, 진지한 장면에서 웃어서 몰입을 방해했다는 것이었다. 실제로 그러한 일이 있었는지는 당사자들만이 아는 문제로 실체를 알 순 없다. 다만 저 행위들이 정말 관크에 해당되는 일인지에 대해선 의아함이 들었다.


공연은 단관하는 예술이다. 불특정 다수가 함께 작품을 관람하는 예술로 응당 서로의 관람을 존중해야 한다. 여기서 존중은 서로의 관람 행태를 이해해주어야 한다는 것이다. 타인의 사소한 인기척이나 생리적 현상은 불가항력적 행위로 감수해야만 한다. 당신은 숨죽여 공연에 몰입하는 관람을 원하더라도, 나는 몰입을 거부하고 거리 두는 관람을 추구할 수 있다. 재미없는 공연을 보면 하품할 수 있으며, 자리가 불편하면 자세를 고쳐 앉을 수도 있는 것이다. 그것에 반응하며 눈치 주고, 헛기침하고, 지적하는 행위가 관크일 수 있지 않을까? 자신의 권리를 위해 남의 권리를 침해하는 것이 얼마나 고압적인가.  


관크 논란에 대처하는 손석구의 자세가 너무나 훌륭했다. 으레적인 사과는 접어두고, 당당하게 자신의 소신을 밝혔다. 무엇보다 의사를 개진하며 비유적으로 표현한 문장이 백미였다.


파란 하늘을 보고 다들 즐거워할 때 누군가는 기억에 따라 눈물이 날 수도 있다.


어느 순간부터 우리 사회는 개인의 사상이나 감정을 통제하려고 든다. 이제는 예술에 대한 감상마저도 획일화하려는 것인가? 당신에게 슬픈 장면이 나에게는 웃길 수 있고, 당신에게 웃긴 장면이 나는 불편할 수 있다. 나는 나를 파괴할 권리가 있듯이, 당신의 슬픔에 동조하지 않을 권리가 있다. 정말 누가 공연 관람을 방해하고 있는지, 공연 문화를 저해하고 있는지 돌이켜보면 좋겠다. 외려 특정 배우를 덕질하는 관객이 내용과는 상관없는 배우 개인기에 고용된 방청객처럼 환호하는 것이 공연의 리듬과 고유성을 깨뜨리는 것이 아닐까?   


변해버린 대학로에 대한 푸념이 길었다. 내가 대학로 공연을 잘 보지 않게 된 이유는 여러 가지로 복잡하게 얽혀있다. 높아진 티켓값, 불편한 좌석, 천편일률적인 공연, 점차 떨어지는 작품의 질, 대학로에 대한 사적 기억 등 다양하다. 그중에 하나가 객석에 생긴 시어머니들과 시누이들의 등쌀이다. 그럼에도 대학로에서 공연하는 동료 배우들이 있고, 나 역시도 공연을 사랑하는 사람으로 완전하게 발길을 끊기는 어렵다.                  

        

그렇기에 나는 꿈꾼다. 혜화동에 다시금 파전 냄새가 풍겨나기를. 젊은 연극인들이 찬란하게 빛나는 소극장들이 빼곡하게 들어차기를. 마로니에의 한적한 여유로움과 낙산공원의 벽화가 다시 생겨나기를. 나의 공연이 많은 사람들에게 즐거움을 주기를. 건강하고 올바른 공연 문화가 자리하여 더 많은 관객들이 자유롭게 대학로를 거닐기를 간절하게 바란다. 나의 글이, 사람들의 관심이 혜화동에게 옛 모습을 되찾아 줄 수 있을 거라 믿는다.


언젠가는 '어쩌다' 공연이 '자주' 공연이 되길 기대하며, 꽤 꾸준하게 공연평을 쓰고자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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