십여 년 전 인상 깊게 본 책이 있다.
히라노 게이치로라는 작가가 쓴
『나란 무엇인가』였다.
그는 나라는 존재를 더 이상 나눌 수 없는
고정된 의미의 개인(個人, individual)이 아니라
사람이나 상황에 따라 다르게 말하고
행동할 수 있는 분인(分人, dividual)의
개념으로 설명했다.
현대사회에서 ‘나’란 실체를
명확히 규정하기란
어려운 일이며,
나라는 사람을
‘1’이라는 정수로 나타낼 수 있다면
분인들을 아무리 합해도 ‘1’이 된다는 것이다.
나는
그의 말에 공감했다.
그리고 속이 후련해졌다.
지금껏 살면서 스스로 던졌던,
또 많은 사람이 나에게 물었던 질문의 답을
시원하게 찾은 것 같았다.
“제가 도대체 어떤 사람인지 모르겠어요.”
“저는 어떤 사람인 것 같아요?”
“나는 도대체 누구일까요?”
나란 실체는 없다.
이런저런 말과 행동을 하는
그런 모습을 모두 합한 게 나다.
그러므로
나는 고정되어 있지 않다.
매일매일 달라진다.
내가 선택하는 것이
나를 다른 나로
만들어간다.
더 나빠지는
내가 될 수도 있고,
더 나아지는 내가 될 수도 있다.
고정된 나를 찾아 나가는 게 인생이 아니다.
아무 모양도 없는 나를 매 순간 다른 선택을 하며
만들어나가는 게 인생이다.
내가 누군지 모르겠다며
상담실을 찾은 사람들에게 “그 모든 걸 합한 게
바로 당신이에요.”라는 말은 큰 위로가 되었다.
내담자들은 모두 고개를 끄덕이며
“그런 거였군요.” 하는
반응을 보였다.
다음 질문은 자연스럽게
“그럼 이제 나는 어떻게 사는 게 좋을까?”
로 이어졌다.
물론 답은 이미 나와 있었다.
그때그때 잘 선택하면
된다.
사람들과 대화를 나누다 보면
이런 질문을 받을 때가 있다.
“혹시 존경하는 분이 있나요?
닮고 싶다고 생각한 사람이
있다면 알려주세요."
안타깝게도 그때마다
나는 제대로 답을 하지 못했다.
닮고 싶은 어른이 없었기 때문이다.
다른 사람들은 다 있는데
나만 닮고 싶은 사람이 없다는 사실이
때로는 의아하게 느껴졌다.
내가 너무
거만한 게 아닌가 하는
생각도 들었다.
그런데 이 책을 읽으며
그 답답함을 해소할 수 있었다.
내가 존경할 만한
미덕을 모두 가진 그런 어른은
세상에 존재하지 않았다.
아니, 존재할 수 없었다.
여러 요소가 합쳐져 내가 되는 것처럼,
모든 사람에게는 닮고 싶은 부분도 있고
닮고 싶지 않은 부분도 있었다.
이 사람에게는 이런 모습을,
저 사람에게는 저런 모습을 닮고 싶은 게
내 정확한 속마음이었다.
‘내가 존경하는 어른들은
나보다 성숙한 모습을 몇 개
더 가진 사람이다.’
물론 그분들에게는
내가 닮고 싶지 않은 부분도 존재한다.
이것이 사람이고 인생이다.
미국의 소설가 너새니얼 호손이 쓴
『큰바위얼굴』에는 큰바위얼굴을 닮은
인자한 사람이 나타나길 평생 기다리는
주인공 어니스트가 등장한다.
하지만 그는 끝내
큰바위얼굴을 닮은 사람을
만나지 못한다.
큰바위얼굴을 닮은 사람은
사실 매일 큰바위얼굴을 바라보며
명상에 매진했던 자신이었기 때문이다.
이 소설이 우리에게 전하는 바는 명징하다.
누군가를 맹목적으로 닮으려 하기보단
곁에 있는 사람들의 좋은 점을 발견하고
그 미덕을 내 것으로 내면화해야 한다는 것이다.
그렇게 스스로
어른이 되려고 노력하는 게
삶의 목적이 되어야 한다는 것이다.
어쩌면 우리는 이미 다른 누군가가
닮고 싶어 하는 부분을 가진 큰바위얼굴을 가진
어른일지도 모른다.
세상에 완벽한 사람은 없다는 사실을 인정했을 때
가장 좋은 점은 다른 사람에게 실망할 일이 없다는 것이다.
모든 실망은 기대로부터 나온다.
완벽에 대한 기대를 버리면 실망에 빠질 일이 없고,
오히려 희망을 품을 수 있다.
아무리 부족한 사람이라도
유심히 살펴보면 배울 점 하나씩은
꼭 있게 마련이기 때문이다.
『나란 무엇인가』를 읽은 뒤
나는 대인관계에서 느끼는 스트레스를
많이 줄일 수 있었다.
사람을 만났을 때
느끼던 문제와 단점들이
더 이상 크게 다가오지 않았다.
대신 “이 사람에게는 무엇을 배울 수 있을까?”
하는 말을 혼잣말처럼 중얼거리게
되었다.
그러다 보니 평소엔 별로라 생각했던 사람도
어느 순간에는 배울 점이 있는 멋진 사람으로
느껴지기 시작했다.
아내와 아들에게도
배울 점이 많았고,
부모 형제도 마찬가지였다.
멀고 가까운 지인들에게도
배울 수 있는 걸 하나씩 발견했다.
꼭 아는 사람이 아니어도 상관없었다.
해외여행을 하며 만난
미국 사람들로부터는 일상을 놀이처럼 즐기는
유쾌함을 배울 수 있었고,
일본 사람들로부터는
질서 정연함과 예의를
배울 수 있었다.
완벽하게 성숙한
어른은 세상에
존재하지 않는다.
다만 꾸준히 배우고 익히며 내면화하는,
성숙한 어른이 되어가는 사람만
존재할 뿐이다.
그리고 이 사실을 아는 사람은
사람으로부터 스트레스 받지 않는
행복한 일상을 즐길 수 있다.
<완벽하지 않아도 참 괜찮은 어른_이서원교수>
“고정된 나를 찾아 나가는 게 인생이 아니다.
아무 모양도 없는 나를 매 순간 다른 선택을 하며 만들어나가는 게 인생이다.”
종종 우리는 스스로에게 묻습니다.
‘나는 어떤 사람인가.’
마음이 흔들릴 때마다
정답처럼 붙잡을 수 있는
단단한 ‘고정된 나’를 찾고 싶어집니다.
흔들리지 않는 기준,
언제 어디서나 같은 모습으로 설명될 수 있는
하나의 명확한 정의.
그러나 이서원 교수는 말합니다.
나는 하나로 고정된 ‘개인(個人)’이 아니라,
상황과 관계 속에서 다른 얼굴을 드러내는 ‘분인(分人)’의 합이라고.
이 문장을 읽으며
완벽히 일관되어야 한다는 부담,
한 번 세운 기준에서 흔들리면 안 된다는 긴장,
‘나는 왜 이렇게 모순적이지’ 하고
스스로를 재단하던 습관이
조금은 느슨해졌습니다.
나는 변합니다.
관계 안에서 달라지고,
경험을 지나며 넓어지고,
때로는 퇴행하고,
다시 선택하며 자라납니다.
그러니 지금의 나를
성급히 단정 지을 필요는 없습니다.
오늘의 선택이
내일의 나를 만들고,
그 내일이 또 다른 나를 열어줍니다.
이 글에서 또 하나 마음에 오래 남은 고백은
‘존경하는 어른이 없었다’는 말이었습니다.
우리는 종종
완성된 모델을 찾습니다.
저 사람처럼 되면 되겠지,
저 길을 그대로 따라가면 안전하겠지.
하지만 세상에
모든 미덕을 다 갖춘 사람은 없습니다.
이 사람에게는 배울 점이 있고,
저 사람에게는 또 다른 빛이 있습니다.
그리고 동시에
닮고 싶지 않은 모습도 함께 존재합니다.
그렇다면 우리의 길은
한 사람을 복제하는 것이 아니라
여러 사람에게서 배운 빛을
조심스럽게 모아
내 삶의 결로 엮어가는 일일지도 모릅니다.
저는 이 대목에서
‘완벽하지 않아도 괜찮다’는 위로보다
더 깊은 안도를 느꼈습니다.
우리는 이미
누군가에게는 배울 점 하나쯤 가진 사람입니다.
내가 모르는 사이
누군가는 내 인내를,
내 태도를,
내 성실함을
조용히 바라보고 있을지도 모릅니다.
완벽을 기대하지 않으면
실망도 줄어듭니다.
실망은
‘저 사람은 이래야 한다’는
기대에서 시작되기 때문입니다.
대신 이렇게 묻는다면 어떨까요.
“이 사람에게서
나는 무엇을 배울 수 있을까?”
그 질문 하나가
관계를 평가의 자리에서
배움의 자리로 옮겨 놓습니다.
그러면 사람은
스트레스의 대상이 아니라
성장의 스승이 됩니다.
어른이 된다는 것은
흠이 없어지는 일이 아니라
흠을 인정하면서도
계속 배우는 선택을 하는 일 아닐까요.
오늘도 우리는
완성된 어른이 아니라
‘되어가는 어른’입니다.
부족함을 끌어안고도
배움을 멈추지 않는 사람.
기대를 내려놓고도
희망을 품는 사람.
그런 우리가
참 괜찮은 어른 아닐까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