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 안의 캐서린, 그리고 알마시 ,사랑을 기억하는 두 개의 얼굴
《잉글리쉬 페이션트》를 보고 나면
이 영화가 사랑 이야기였다는 사실보다
사랑을 기억하는 방식에 대한 이야기였다는 생각이 더 오래 남는다.
나는 처음에 캐서린에게 마음이 갔다.
그녀는 알고 있었다.
그 사랑이 안전하지 않다는 것을,
그 끝이 무너지리라는 것을.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녀는 자신의 마음을 부정하지 않았다.
내 안의 캐서린은
세상이 그어놓은 선을 너무 또렷이 보면서도
그 선을 넘는 감정의 진실을 외면하지 않는 존재다.
그녀는 사랑을 선택한 것이 아니라,
사랑 앞에서 자신에게 거짓말하지 않기로 선택한 사람이었다.
“당신이 와서 나를 바람의 궁전으로 데려가 줄 거란 걸 알아요.”
그 문장은 희망이라기보다
사랑을 마지막까지 존중하고 싶은 마음에 가까웠다.
그녀에게 바람은 도피가 아니라
경계가 사라지는 장소,
사랑이 이름 없이 존재할 수 있는 세계였다.
그렇게 내 안의 캐서린은
사랑을 말로 남겼다.
편지로, 문장으로, 시처럼.
그리고 그 사랑을
온몸으로 기억하는 사람이 있었다.
알마시였다.
내 안의 알마시는
캐서린이 남긴 말을
살아남은 쪽의 방식으로 견디는 존재다.
그는 사랑을 설명하지 않는다.
정당화하지도 않는다.
그저 기억한다.
얼굴이 타버리고,
이름이 사라지고,
어느 나라 사람인지조차 중요하지 않게 된 뒤에도
그에게 남아 있던 것은
사랑의 장면들이었다.
사막의 바람,
동굴의 어둠,
기다림의 시간.
내 안의 알마시는 말한다.
“나는 그 사람을 지키지 못했지만,
그 사랑을 버리지는 않았다.”
나는 이 두 사람을 보며
사랑의 두 얼굴을 생각했다.
사랑을 말하는 사람과
사랑을 침묵으로 살아내는 사람.
캐서린은 사랑을 시로 남겼고,
알마시는 사랑을 상처로 품었다.
하나는 죽음 속에서 사랑을 완성했고,
다른 하나는 삶 속에서 그 사랑을 견뎠다.
어쩌면 우리 안에도
이 두 사람이 함께 살고 있는지도 모른다.
어떤 날의 나는
내 안의 캐서린처럼
사랑을 말하고 싶어 한다.
이 감정이 무엇인지,
왜 그런지,
끝이 보이지 않아도
지금의 진실을 놓치고 싶지 않다.
그리고 또 어떤 날의 나는
내 안의 알마시처럼
아무 말도 하지 않은 채
그 사랑을 혼자 견딘다.
설명하지 않아도,
이해받지 않아도,
그 기억이 나를 구성하고 있다는 사실만으로.
이 영화가 오래 남는 이유는
사랑의 성공이나 실패를 말하지 않기 때문이다.
대신 묻는다.
“당신은 사랑을 어떻게 기억하는가?”
나는 이제 조금 알 것 같다.
사랑은 끝나도
기억은 남고,
그 기억은 때로
우리를 태우고,
때로 우리를 살린다.
내 안의 캐서린과 알마시는
오늘도 나 안에서 함께 숨 쉬고 있다.
하나는 사랑을 말하게 하고,
다른 하나는 그 사랑을 끝까지 품게 하면서.
그리고 나는
그 둘 사이에서
조금 더 솔직한 사람이 되어 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