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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졸린저녁 Jul 07. 2017

별 일 없던 날의 궁상


 아침부터 부지런을 떨며 반찬을 만들었다. 


 감자채 볶음, 상추 겉절이, 김 조림. 베테랑(?) 주부라면 휘리릭 만들어 낼 간단한 반찬을 궁중요리 만들 듯 공을 들여 만들어내니 금방 점심시간이 다가온다. 


 새로 한 반찬을 반찬통에 고이 담아 식혀 두고 냉장고를 뒤적여 남아있던 헌(?) 반찬들을 꺼냈다. 시들어버린 상추 겉절이, 만든 지 2주 가까이 된 건새우마늘쫑 볶음. 설거지가 귀찮아 방금 상추 겉절이를 버무려 낸 양푼에 헌반찬들을 탈탈 털어넣고는 밥 한 술을 올려 이리 슥삭 저리 슥삭 비벼내었다. 그리곤 우걱우걱....에이씨 때려쳐!

 

 회사를 그만두고 전업주부로 변신한지 몇 달, 사람이란 경제활동을 하지 않으면 이리도 급격하게 궁상맞아 지는가보다. 인간의 존엄성이란 A부터 Z까지 전부 경제활동(=돈)을 기반으로 유지되는 것 같아 잠시 씁쓰름. 목으로 넘어가는 밥알이 깔깔해 급하게 달걀 후라이 한 장을 부쳐내어 올렸다. 참기름도 쪼로록. 이야~헌반찬으로 비벼낸 궁상맞은 밥이 노른자 하나에 그럴 듯해지는구나. 약간의 데코레이션에 내 존엄성이 조금 회복되는 것 같아 남은 밥을 맛나게 뚝딱했다. 옳아, 비빔밥엔 달걀이 필수지!


 오후엔 산모교실을 가야 하니 이제부턴 더 바쁘게 움직여야 한다. 청소기도 돌려야 하고 빨래도 걷어야 하고...한시간 남짓 걸려 시내에 나갈거니 나도 좀 꾸며야지.

 산모교실이니 베이비페어이니 귀찮게스리 왜 가는거야? 라던 생각은 집에서 멍 때리며 자존감 깎아먹는 시간을 거치며 급격하게 바뀌었다. 산모교실? 돈 안들이고 갈 수 있는 몇 안되는 인문학 강의다. 베이비페어? 정보교류의 장이지. 그리고 두 행사 다 임산부의 경제활동으론 탑 오브 탑인 걸. 물론 사은품에 당첨되어야 한다는 전제가 깔리지만...




 생각해보니 나도 몇 년간 육아용품 브랜드의 온라인 커뮤니티를 운영하며 참 많은 오프라인 행사들을 기획하고 진행했었다. 마케터이니 문화클래스이니 하는 다채로운 호칭으로 엄마들의 참여를 유도하면서도 아이를 들쳐 업거나 안아 올려 행사에 참가하는 엄마들을 보며 저렇게 힘든데 왜 여기까지...라는 생각을 했던 것 같다. 

 

 사람은 참 간사해. 아니지, 내가 간사한거지. 그 힘든데 부득불 참석하는 입장이 되어보니 비로소 알겠다. 집에서 궁상맞아지지 않으려면 밖으로 나가야 한다. 나가되 돈이 안 드는 범위에서 움직여야 한다. 가정경제에 보탬이 된다면 더 좋겠지. 집 안에 있으면 부엌데기에 식충이 정도로 느껴지는 내 자존감도 집 밖으로 나와 행사에 참가하면 산모님, 어머님 소리를 들으며 조금은 회복된다. 엄마들을 대상으로 하는 행사 이름이 하나같이 거창한 것도 행사 장소가 호화로운 것도 나와 같은 사람의 마음 속 상실감을 기가 막히게 캐치하여 채워주는 마케팅 도구였다. 난 브랜드 품위유지 때문에 그런 줄 알았네....가만, 난 왜 그걸 이제야 알았지? 아, 내가 간사해서 경험하지 못한 걸 상상해내지 못한 거였구나...




 무려 1시간 하고도 30분이나 더 걸려 찾아간 산모교실에서 용케 사은품에 당첨되었다. 나에겐 이런 운은 없지라는 자포자기함으로 사은품을 기대하는 속물스런 마음을 억누른 채 영혼없는 박수를 열심히 치고 있었는데, 내 번호가 호명되니 나도 모르게 엉덩이가 들썩들썩 하더라. 검색해보니 무려 5만원 상당의 제품이다. 비록 이 제품의 쓰임새가 뭔지는 잘 모르겠다만....젖병 워머가 뭐래 대체;;;


 돌아오는 길에 다른 업체의 산모교실 행사 정보를 신나게 뒤적거렸다. 일당 5만원에 자존감 회복이면 남는 장사했지 뭐. 다음 행사에서도 남는 장사를 기대해봐야겠다. 


 뭐, 다들 이렇게 사는 거 아니겠어?

 오늘도 참 별 일 없이 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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