살아온 시간을 돌아보며
평범한 직장인인 나에게 평범하지 않은 점이 하나 있다면 아침에 눈이 떠지자마자 활동 전임에도 불구하고 배가 고프다는 것이다. 그래도 침대에 조금 더 있고 싶은 욕심에 매일 ‘아침밥을 챙겨 먹을까, 잠을 좀 더 잘까’ ‘정성 들여 외출 준비를 할까, 선크림만 바르고 나갈까’ 고민하는 가운데 결국엔 고생한 ‘어제의 나’에게 보상을 준답시고 잠을 좀 더 자고, 잘 보일 사람도 없다며 선크림만 바르고 집 밖을 나간다.
원래라면 평범해야 하는 오늘을 평범하지 않게 만들어준 것은 부모님이 계시는 시골에 내려가는 일정이다. 필리핀은 크리스마스와 연말을 한국의 추석, 설날과 같은 명절로 여겨 가족들끼리 모이는 문화가 있는데, 전 세계 어디를 가나 똑같겠지만 명절날 시골로 내려가는 버스표, 비행기표, 배표를 구매하는 것은 ‘하늘에 별 따기’이다. 온라인 예약 시스템이 없어 3일 전에 터미널에서 5시간을 대기하다가 버스표를 끊은 나에게는 연말을 맞이하여 부모님 집에 쉬러 가는 오늘이 결코 평범할 수 없다.
집을 비웠다가 돌아왔을 때 깨끗하게 정리된 집이 나를 환영해주는 느낌이 좋아 항상 떠나기 전에 집 청소부터 이불 빨래까지 하고 가는데, 오늘은 일찍 일어나 세탁기에 이불을 돌렸음에도 시간을 잘 못 맞춰 출근하기 전에 이불 널어놓는 데에 실패를 했다. 이미 돌아가는 세탁기를 정지할 수 없어 일단 출근을 해 업무를 조금 보다가 이불을 널기 위해 집에 돌아왔다. 업무를 보다 잠시 집에 온 것이기에 나는 정신없는 걸음으로 콘도 로비를 통과했는데, 그 바쁜 와중에 어느 평범하지 않은 광경에 시선이 갔다. 친오빠일 것 같아 보이는 남자와 콘도 경비원의 부축임을 받아 휠체어에서 차로 옮겨 타는 여자가 있었다. ‘우리 콘도에 저런 가족이 사는구나’라고 생각하며 엘리베이터를 기다리는데 누군가 나를 보는 시선이 느껴져 그 방향으로 고개를 돌렸더니 문이 열린 차 안에서 나를 쳐다보던 그 여자가 보였고, 우리는 눈이 마주쳤다.
잠깐 눈이 마주친 것뿐이었고, 외국인으로서 필리핀에 사는 내가 시선을 받는 것은 흔한 일이었으며 (게다가 정신없이 빠른 걸음으로 걷고 있었으니 얼마나 눈에 띄었을까), 나도 몸이 아픈 사람을 보는 것이 처음이 아니기에 별일 아닐 수 있었지만 다른 사람의 도움 없이는 차에 탈 수 없던 그녀가 또래로 보여 다른 느낌을 받았다.
오늘 하루를 시작하며 내가 중요시 여겼던 것들은 누구나 하는 평범한 고민거리들이었다. ‘몇 시에 일어나 세탁기를 돌려야 출근 전에 빨래를 널 수 있을까?’ ‘시골에 내려가는 짐을 챙기긴 했는데 완벽하게 챙기지 않은 느낌이 없지 않으니 일찍 퇴근하고 한 번 더 점검해볼까?’ ‘벌써 배고픈데 점심은 뭐 먹지?’ 오늘 하루뿐만이 아니라 일상생활에서의 작은 고민들과 내 진로와 삶에 대한 큰 고민들은 누구나 하는 평범한 것들이다. ‘지금 나에게 주어진 조건들과 내가 가진 야망으로 이 삶을 어떻게 잘 살아갈 수 있을까?’ 하는 생각들과 사실 내 머릿속의 더 큰 자리를 차지하는 잡념들. 이런 생각들이 모이고 정리되어 매일 하는 선택의 방향이 잡히고, 그런 긍정적인 순간들과 부정적인 순간들이 채우는 '매일'들이 모여 내 삶이 빚어지고 있다.
그런 평범함에서 조금 벗어난 일상을 가진 그녀는 생각하는 것들이 나와 다를 것이다. 그녀의 하루 오만 가지 생각은 아마 이런 것들일 테다. ‘외출해야 하는데 오늘은 엄마가 몸이 아파 쉬고 있으니 오빠가 화장실에 데려다주려나?’ ‘차에 타는 일을 항상 도와주는 이 경비 아저씨에게 크리스마스 선물을 뭐하면 좋지?’ ‘한국사람 같이 생긴 저 여자는 뭐가 그렇게 급하다고 뛰다시피 걷는 걸까?’ 이것들은 내가 생각하는 그녀의 생각들이기에 당연히 실제와 완벽히 들어맞지 않을 것이다. 하지만 ‘내가 그 여자의 상황에 있다면 나는 그런 생각으로 하루하루를 보내지 않을까’ 하며 집으로 올라가는 엘리베이터를 탔다.
감사하게도 나에게 주어진 것들에 의해 성장하고 더 좋은 사람이 될 수 있었던 '올해의 나'는 그 가능성을 과연 최대화한 것이 맞을까 싶기도 하고, 가진 것들보다는 갖지 못 한 것들에 불만하고, 쟁취한 것들보다는 후회스러운 일들에 더 한탄하지 않았나 싶어 올해를 잘 보낸 것일까 생각하게 되었다. 그런 생각을 하는 순간에도 ‘이미 지난 일에 쓸데없는 감정소비하지 말라’고 나에게 잔소리하는 내 모습을 보며, 다음 해에는 감정적 건강도 지키고 연말에 덜 후회하는 사람으로 발전할 필요가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올해의 나'는 인정받는 직원이 되기 위해 일에 열정을 불태웠고, 완전히 마음이 들어맞지는 않지만 서로 좋은 일, 나쁜 일들이 있을 때 공유할 수 있어서 좋은 친구들과 시간들을 보냈고, 나름 일과 삶의 균형이 잡혔다는 만족감을 얻기 위해 한 달에 75km 조깅을 하고, 매주 할 수 있는 운동을 찾았고, 가족과의 시간도 잃지 않으려 부모님과 영상통화 시간도 늘렸다. '다음 해의 나'는 어떨지 모르겠지만, 이번 해가 이렇게 빨리 갔다면 다음 해는 더 빨리 갈 것이기에 마음의 준비를 해야겠다 싶다.
이 세상에 다 각자 다른 형편 속에 사는 개개인이 가진 생각들은 내가 귀로 들었던 것들과 머리로 추정하는 것들보다 훨씬 다양할 것이다. 휠체어를 타는 그 여자 인생의 한순간과 내 인생의 한순간이 딱 한 번 교차되기 전까지는 같은 곳에 살면서도 나는 그의 삶에 전혀 공감하지 못했을 것과 말이다. 어찌 됐건 깊은 감정에 빠질 여유가 없던 나는 그렇게 세탁을 마친 이불을 널고 다시 회사로 돌아가 바쁜 하루를 이어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