머리가 마시는 브레인트로피아닷컴의 추억
따라올테면 따라와봐, ADSL의 8Mbps 속도가 엄청난 혁신이었던 시절.
Y2K, 밀레니엄버그 이슈로 혼란스러웠던 2000년이 지나고, 바야흐로 www 인터넷시대가 열리며 한창 닷컴 열풍이 불던 2000년대 초반.
당시 10대들의 관심사 한가운데에는, "피쓰비 이즈 마이 네트워크 아이디"라는 신박한 노래와 함께 나타난 10대 소녀 보아가 있었다. 어느 날 보아가 텔레비전 광고에 나와 상큼한 표정으로, 마치 컨디션같이 생긴 드링크를 쭉 들이킨다. 그리고 빈 병을 흔들어 보이며 노래한다. "머리가 마시는~ 브레인트로피아닷컴!"
이 영상과 노래, 이미지를 기억한다면 당신은 분명 나와 같은 세대일 거다. (또는 우리 부모님 세대이실 겁니다.)
중학교 2학년 때였다. 중2병이 심하게 도져서, 공부보다도 다른 것에 관심이 더 많았다. 학교에서는 선도부원이고 반장이면서도, 선생님들에게 그렇게 반항을 해 댔다. 자꾸 개긴다(대들고 반항한다)고 해서 담임 선생님이 내게 개기지마 임마, 라는 뜻으로 개마라는 별명을 붙였다. 그 무렵 술도 배워서 2002년 월드컵 혼란스러운 틈을 타 동네에 있는 대학교 교정에 숨어 친구들과 술을 마시기도 했다. 그렇지만 또 성적은 잘 내고 싶었다. 보아 언니가 나오는 광고를 보고 약국에 가서 브레인트로피아닷컴을 달라고 했다. 한병에 2천원이란다. 당시 나에게는 너무 비싼 음료였다. 발길을 돌려 집에 돌아와 아버지께 조심스레 부탁드렸다. 아빠, 저 저거 마셔보고 싶어요. 아빠는 고개를 갸웃거리셨다. 저거 다 상술일건데.
안 사 주실 것처럼 그러더니만 중간고사를 하루 앞두고 아버지가 브레인트로피아닷컴을 세 병 사오셨다. 아빠 감사해요, 저 성적 진짜 잘 낼 수 있을 것 같아요. 기쁜 마음으로 병을 따 들이켰다. 보아 언니가 그랬던 것처럼 멋드러지게.
무슨 맛이라고 해야 하나. 초록매실 맛 같기도 하고 박카스 맛 같기도 한, 먹기에는 나쁘지 않은 맛의 음료였다. 당연히 기분 탓이겠지만, 음료를 마시고 책상 앞에 앉으니 갑자기 공부가 엄청 잘 되는 것 같았다. 그런데 나는 심각한 기분파다. 사실 지금도 일하다 말고 갑자기 글을 쓰고 싶어져 브런치를 열었는데, 15살의 나도 똑같았다. 그게 늘 문제다.
브레인트로피아닷컴을 마신 나는 갑자기 모든 지식이 머릿속에 쏙쏙 들어오는 것 같은 기분이 들어 사회 교과서와 참고서 대신 백과사전을 펼쳤다. 교과서에 나오는 내용만 보면 될걸, 관련된 내용이 있는 백과사전의 챕터를 모두 찾아 읽었다. 갑자기 엄청 똑똑한 박사가 된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 백과사전을 읽다 잠이 와서 책을 덮고 뿌듯하게 잠을 잤다. 그리고 그 학기 중간고사 때 역대 최악의 성적을 받았다. 아버지가 사다 주신 브레인트로피아닷컴을 너무 시험일에 임박해서 먹었던 게 실패의 원인인 것 같았다. 남은 두 병의 음료는 아껴 두었다가 기말고사 전에 두 차례에 나누어 먹었다. 시험 전날 백과사전을 펼쳐 보지는 않았다. 다행히 성적은 조금 올랐다. 그러나 다시는 브레인트로피아닷컴을 찾지 않았다.
꾸준히 복용해 봤다면 어땠을까. 나름 집중력이나 기억력은 높아지지 않았었을까 싶다. 그 때는 그게 어떤 성분인지도 모르고, 브레인이 마시는 영양제라니까, 이름도 최첨단스럽게 브레인트로피아닷컴이니까, 천재 보아 언니가 마시니까 한 병만 마셔도 당연히 공부가 잘 될 거라 생각하고 먹었던 거다. 이제 와서 그 때를 돌아보며 그 때 내가 들이킨 그 음료가 어떤 성분이었는지 궁금해졌다.
포스터에서 볼 수 있듯, 브레인트로피아닷컴의 주 성분은 원지추출물이었다. 원지추출물은 실제로 식약처에서 인정한 "기억력 개선에 도움을 줄 수 있는" 건강기능식품 원료로서 등재되어 있었다.
원지(遠志).
뜻을 오래 가지고 갈 수 있게 해준다는 이름처럼, 예전부터 기억력 향상에 도움이 되는 것으로 알려져 온 생약이란다. 지금도 있는지 모르겠지만, 어릴 적 전설처럼 들려오던 "총명탕", 공부 잘하게 해 준다는 약이라는 걸 한약 조제가 가능한 약국에서 종종 고가에 판매하는 걸 본 적이 있었다. 그런데 거기에 들어가는 주 성분이 원지라고 한다. 원지는 이렇게 생겼다.
그런데 이 원지가 작용하는 원리는, 현재 치매 환자들에게 처방되는 약의 기전과 크게 다를 바가 없다. 아세틸콜린이라 하는 신경전달물질이 크게 줄어들게 되면 인지기능이 떨어지고, 치매 증상이 나타나게 되는데 이걸 막아주는 것이 현재 주로 사용되는 치매약의 원리이다. 원지 또한 같은 역할을 함으로써 기억력과 인지기능 증진에 도움을 준다고 알려져 있다. 원지추출물이 들어간 음료를 한 병 먹는다고 해서 바로 뿅 성적이 오르는 마법의 성분은 아니지만, 꾸준히 복용했다면 머리가 맑아지는 효과는 분명 있었을 것이다.
그런데 요즘 공부 잘하는 약이라고 알려져 있는 건 좀 다른 분야의 약인 것 같다. 사실은 걱정스러운 얘기다. 그냥 기억력을 개선해 주는 약이 아니라 바짝 집중력을 높여 주는 약이다. 메틸페니데이트, 아토목세틴 같은 성분의 '각성제'이다. 기면증과 같은 수면장애, 또는 ADHD가 있는 성인이나 아이들에게만 의사 판단 하에 처방되어야 하는데 공부 잘하는 약이라고 소문이 잘못 나는 바람에, 대치동에서는 멀쩡한 아이들까지도 그 약을 처방받아서 먹고 있다고 한다.
우리나라는 그나마 양호한 편이다. 미국 팔로알토 지역의 대학생들을 살펴보면, 그걸 먹지 않는 학생이 더 적고, 학생들 사이에 공공연하게 거래도 이뤄진다고 한다(더 자세한 내용은 넷플릭스의 "슈퍼맨 각성제" 다큐멘터리를 추천한다). 모두가 이 약을 먹는데 왜 나만 맨 머리(?)로 경쟁을 해야 하느냐는 억울함과 불안한 심리가 이 각성제 남용이 만연해진 주요 원인이란다.
이런 각성제류는 심리적 의존성이 강해 무분별하게 복용할 경우 점점 복용량을 늘리게 되는 경우가 많고, 복용량을 늘릴 경우 환각이나 망상에 시달릴 가능성도 높다(특히 소아에게서). 또 약을 중단할 경우 금단 현상, 특히 심리적 불안감이 매우 심해지기 때문에 가급적이면 치료 목적 이외로 사용하지 않는 것이 좋다. 영화 및 드라마로도 제작된 "리미트리스"의 줄거리는 사실 실화를 좀더 극단적으로 만든 케이스라고 봐도 좋을 것이다.
그런데 문득 이런 생각이 든다. 만약 내가 어떤 경로로든 이 약을 구할 수 있다면? 나는 수면장애 치료 이외의 목적으로 복용하지 않을 자신이 있나? 글쎄. 브레인트로피아닷컴의 환상에 사로잡혔던 것처럼 이 약에도 혹하게 될 가능성이 아예 없다고는 못 하겠다. 차이가 있다면 브레인트로피아닷컴은 그냥 사 먹는다고 잡혀가지 않지만 각성제는 잘못 먹으면 잡혀갈 수도 있다. 15살의 나나 지금 30대의 나나 그런 유혹에 아주 단단하지는 않은 것 같으니 항상 마음 다잡고 성실하게 살아야겠다. 오늘의 회상 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