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필더필즈 Nov 15. 2022

20여년 만에 찾아온 너에게 약을 건넸다

보고 싶었어

20여년 전, 초등학교의 봄.

너는 HOT가 그려진 편지지에 삐뚤빼뚤한 글씨로 '너랑 친해지고 싶어. 우리 집에 가서 놀자. 우리 아파트는 쌍용아파트 103동 XXX호야.' 라고 편지를 써서 수업 시간에 내게 건넸다. 그날 나는 너희 집에 가서 가요 테이프를 틀어 놓고 같이 그림을 그리고, 신기한 장난감들을 구경하고, 아파트 앞 상가 외부에 놓인 뽑기 기계에서 한참동안 게임을 했다. 너는 얼굴이 뽀얗고 눈이 크고 목소리가 또렷한, 사랑스러운 아이였다. 이름이 둘 다 특이했던 우리는, 그날부로 단짝 친구가 되었다. 


한 학년 올라갈 때에도 너와 같은 반이 되어 행복하다고 생각했다. 그런데 어느 날부터 네가 학교에 나오지 않았다. 집에 가서 벨을 눌러도 아무도 나오지 않았다. 집 전화도 받지 않았다. 반장이었던 나와 부반장이었던 도키(별명)에게 선생님이 먼저 이야기해 주셨다. 네가 백혈병이라는 병에 걸려 많이 아프다고. 당분간 학교에 나오지 못할 거라고 했다. 나는 한동안 너를 만나지 못했다. 


시간이 빠르게 흘러 2학기, 가을이 되었다. 너는 개학한 후에도 모습을 드러내지 않다가 개학으로부터 2주 뒤쯤 우리 앞에 나타났다. 머리를 다 밀고 온 몸이 퉁퉁 부어, 동그랗던 얼굴은 더 동그래졌고 하얗던 얼굴은 더 창백해져 있었다. 그러나 너는 수줍게 자리에 바로 앉기는커녕 교탁 앞에 서서 씩씩하게 복귀 인사를 했다. 용감하게 싸우고 돌아온 너를 모두가 멋진 영웅처럼 바라보았고, 자연스럽게 너는 만장일치로 2학기 반장이 되었다.

 

나는 네가 참 자랑스러웠다. 하지만 한편으로는 네가 어색했다. 몇달 간 보지 못해서 어색했을까, 너에게서 느껴지는 병의 기운이 무서웠을까. 너무나 고통스러운 날들을 겪고 돌아온 너에게 내가 해줄 수 있는 것이 딱히 없다는 것을 알고 나도 모르게 한발짝 뒤로 물러난 것일까. 이 힘든 시간이 너에게서 계속될 것이라는 것을 직감했기 때문일까. 나는 네 옆에 있으면서도 네가 어색하고 무서웠다. 


오랜만에 너희 집에 다시 놀러갔을 때에서야 나는 다시 전처럼 너를 편안하게 느낄 수 있었다. 너희 어머니께서 피자를 사 주셨다. 너는 접시도 따로 쓰고 콜라도 따로 전용 컵에 따라 마셨다. 한참 놀던 중, 신기한 거 보여줄까, 하면서 너는 등을 내 쪽으로 돌려 옷을 들어올렸다. 여기 봐봐, 나 구멍이 생겼어. 골수천자를 했던 자리가 선명하게 남아 있었다. 엄청 아팠겠다, 아니 하나도 안 아팠어. 너는 자랑스럽게 이야기했다. 우리는 그 동안 각자가 학교에서, 병원에서 겪었던 일들을 마구마구 쏟아내고 즐거워했다. 그런데 네가 갑자기 피곤하다고 했다. 어머님께서는 네가 쉬어야 할 것 같다고, 우리를 황급히 돌려 보내셨다. 


너는 또 다시 학교에 나오지 않았다. 그리고 다음날, 학교 선생님이 아닌 우리 엄마에게 너의 소식을 들었다. 이제 영영 너를 볼 수 없게 되었다고. 평소 너를 너무나 예뻐했던 우리 엄마가 나보다 더 서럽게 우셔서 내 눈물이 오히려 쏙 들어가려 했다. 나는 소식을 들은 그 날보다, 그 다음날 더 많이 울었다. 발야구를 하다가 울고 수업시간에 칠판을 보다가 울고 집에 가다가도 울었다. 볼 수 없다는 것을 알면서도 너희 집으로 갔다. 이사를 가시려는지 너의 흔적을 다 정리하시려는 건지 아파트 대문을 활짝 열어 놓은 채 너의 옷가지를 어딘가에 싸고 계신 어머님을 보고서야, 네가 더 이상 없음을 선명하게 인식하고 돌아섰다.


당시 유행했던 삐삐 메세지가 있었다. 002*. 영영 이별이라는 뜻이라고 했다. 나는 너와 내가 002*의 사이가 되었다고 일기장에 썼다. 일기를 본 담임선생님이 수업이 끝나고 난 후 나를 불러서 꼬옥 안아 주셨다. 선생님의 얼굴은 이제 기억이 잘 나지 않는데, 선생님의 셔츠에서 나던 향수 냄새만은 기억이 난다.


시간은 빠르게 흘렀고 나는 어른이 되었다. 가끔 소아병동에 있는 아이들을 보면 네 생각이 나기도 했지만, 나는 아주 오랫동안, 긴긴 시간 동안 너를 아득히 먼 곳에 두고 살았다. 





그리고 어제 저녁 잠깐 소파에서 잠이 들었을 때, 짧은 꿈을 꾸었다.

 

나는 조제실에서 약을 조제하고 있었다. 그 때 누군가 들어오는 소리가 났다. 나는 잠시 하던 일을 멈추고 조제실 밖으로 나갔다. 네가, 그리고 네 어깨를 양손으로 감싼 채 너를 앞세워 들어오시는 너의 어머님이 보였다. 너는 여전히 시원한 삭발이었고, 커다란 티셔츠를 입고 있었다. 약을 타러 왔다고, 얼굴이 흐려져 보이지 않는 너희 어머님이 말씀하셨다. 꿈 속에서 나는 뭐였는지도 모를 약과 시럽병을 너에게 건넸다.

우리는 아무런 대화도 하지 않았다. 약을 건네고 나서, 나는 그냥 너를 계속 안고 있었다. 20년 전의 나는 너보다 한참 작았지만 이제는 너보다 조금 더 크기에, 바닥에 쭈그려 앉은 채 너를 안고 있었다. 낙낙한 반팔 소매 밖으로 나온 새하얀 너의 팔을 보면서 너를 안고 있었다. 꿈 속에서 나는 슬프지 않았다. 오랜만에 만났다는 것도 모르고 있었다. 그냥 그래야 할 것 같아서, 그러고 싶어서 너를 계속 안고 있었다. 그러다 꿈에서 깼다. 꿈에서 깨고서야 네가 많이 그리웠다는 것을 알았다. 너는 그렇게 20년 만에 나를 만나러 왔다. 그리고 나는 너를 조금도 잊지 않았다. 






권진아 - 꿈에서 만나

https://youtu.be/wqXwYTtwwa0


어쩐 일이야
네가 참 그리웠다
왜 이제야 나왔어 미워

봄날이 다가오면
벌써부터 겁이 나
아득히 져버린 넌 기억을 두드려
날 몹시도 괴롭혔다


지금 이 꿈에서 깨더라도
잊지 않을게
너의 온기 말할 때에 전해지는
숨결을 기억할게


맞아 네가 있던 세상은
이 느낌이었지
반가웠어
꼭 또다시 꿈에서 만나




작가의 이전글 새송이버섯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