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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필더필즈 Sep 02. 2020

드셔 보신 적... 있으세요?

Plan B, 사후피임약 이야기

약국에서 환자 분들에게 약을 드릴 때에, 내가 종종 묻는 말이 있다.


"이 약 드셔 보신 적 있으세요?"


그렇게 묻는 이유는 크게 두 가지이다. 

1. 약국이 바쁘든 손님이 바쁘든 어쨌든, 가급적 복약지도를 효율적으로 끝내야 하는 상황일 때. 이미 자주 먹어서 잘 알고 있는 약에 대해 길게 설명하는 것을 싫어하는 손님들도 많다. 실제로 자세하게 설명을 해 드리려고 하는 약사에게 '닥치고 약이나 줘'라고 하는 할아버지가 계셨으니..

2. 환자분께 본인이 처방 받은 약을 다시 상기시켜 드리고, 혹시 이전에 이 약을 먹고 약에 알러지 반응을 보이거나 위장장애 등을 보인 적이 있는지를 확인하기 위해서다. 실제로 종종 있는 일로, 특정 항생제에 심하게 배앓이를 했던 적이 있는데 해당 항생제가 다시 처방되었거나, 예전에 처방 받았던 진통제에 심한 울렁거림을 느껴 고생한 적이 있었는데 그 약을 다시 마주하게 되었거나 하는 일들. 이런 경험을 환자분이 공유해 주면, 필요한 경우 처방의와 상의하여 처방을 변경하거나, 적절한 대처 방법을 설명해 줄 수 있다. 


그런데, 

"이 약 드셔 보신 적 있으세요?"

이 질문을 정말 조심해서 내뱉어야 하는 순간이 있다.


지하철역으로 이어지는 유흥가 센터에 위치한 약국에서 근무한 적이 있다. 근무지 주변의 환경은 썩 좋지 않았다. 특히 금요일 저녁 시간에 퇴근할 때에면 초저녁부터 술에 취해 길빵을 하고 있는 청춘들을 마주칠 수 있었고, 토요일 아침에 출근할 때에는 아직 정신을 되찾지 못하고 취기에 흐느적거리는 이들, 편의점에서 해장라면을 먹는 이들을 만날 수 있었다. 비릿한 술냄새와 담배 냄새, 간밤의 파티가 새벽 적막 속으로 사라지고 난 후의 알싸한 냄새가 배어 있는 골목을 지나면 약국에 도착할 수 있었다. 


그런 토요일 아침의 손님들 중 상당수는 20대의 풋풋한 친구들로서, 약국 문을 열고 들어와 숙취해소제 세트를 찾고, 위장약을 찾고, 간 해독에 좋은 약을 달라고 요청하곤 했다. 지금처럼 모두가 마스크를 쓰지 않던 시절, 알코올이 분해되어 가는 냄새가 손님의 체취와 숨결을 타고 내게로 날아오면 그렇게 밤새 술을 마실 수 있는 체력이 그립기도 하고, 괜히 나까지 어제 한바탕 술을 먹은 기분이 들어 매운 해장국 한 그릇을 먹고 싶어지기도 했다.


손님들이 숙취를 깨기 위한 약만 찾는 것은 아니었다. 연인이든 썸이든 간밤에 요앞에서 처음 만난 사람이든, 술기운을 연료 삼아 좀더 적극적으로 바디랭귀지를 나눈 남녀들이 있었으리라.

간밤의 뜨겁고 달콤하고 몽롱했던 시간에서 문득 각성의 시간으로 넘어오게 되면, 그들은 내려야 할 버스정류장을 한참 지나쳐 내린 사람의 표정*으로 - 병원을 거쳐 약국을 찾아와 처방전을 내민다. 딱 한 번 먹도록 기재된 처방전, 사후피임약.


*이 표정은 크게 두 가지를 의미한다. 

1. 이런 일이 처음인 사람 - 불안과 초조함이 주된 표정이다. 병원에서 산부인과 선생님한테 이미 한차례 잔소리를 듣고 내려온 경우가 많다. 

2. 몇 번째 이런 일이 있었던 사람, 사후피임약 처방전을 가지고 나와 대면한 일이 이미 몇 번째인 사람 - 귀찮음과 짜증스러움. 아 또 망했네, 하는 표정. 걍 빨리 약 먹고 가고 싶음.


돌이켜 생각해보면, 내가 처음으로 사후피임약을 복용하게 되었을 때 -

마음이 복잡하고 돈도 아깝고 이런 일이 생기게 만든 상대방에게 짜증도 나고 그러면서도

뭔가 담배를 처음 피워 보았을 때의 느낌처럼, 어른들이 할 수 있는 일탈을 하나 더 경험함으로 인해 좀더 어른이 된 것 같다는, 그런 유치하고 철없는 생각을 하기도 했던 것 같다. 우습다.


사후피임약을 처방받았던 순간들 중 절반은, 그 순간에 나 혼자였다. 지금 생각하면 나는 그냥 나를 아끼는 방법을 몰랐고 나를 아껴주는 사람을 만날 줄도 몰랐던 멍청이였다(사실 나를 아끼는 방법은 지금도 잘 모르지만).

약국에서 일하면서 사후피임약을 받으러 오는 사람들 중 반 이상이 남자친구 혹은 남자친구가 아니더라도 최소한 따뜻한 책임감을 가진 상대방과 함께 방문하는 것을 보았을 때, 하하 난 참 멍청했어, 라는 생각을 몇번이고 다시 하곤 했다. 지금이야 감사하게도 나를 아껴주는 따뜻한 사람과 함께 살고 있지만.



사후피임약 복약지도는 빠르게 이루어진다. 지금 바로 드셔야 해요. 사건이 발생한(...) 시점으로부터, 72시간 (또는 120시간) 이내에 복용해야 효과가 있고 시간이 지날수록 효과는 떨어집니다. 속이 울렁거릴 수 있어요. 세 시간 이내에 토하면 다시 처방받아 드셔야 해요. 호르몬의 급격한 변화를 유발하는 약입니다. 신체 컨디션이나 기분 변화가 심할 수 있어요. 2-3일 정도의 부정출혈이 있을 수 있지만 피가 비치더라도 너무 걱정하지는 마시고, 출혈이 지속되고 양이 많으면 병원을 방문해 주셔야 해요. 참고로 흡연을 하시는 분일 경우 혈전 위험이 있습니다.



그런데 이 복약지도의 플로우와 어조는 해당 여성분이 혼자 왔느냐, 상대방과 함께 왔느냐에 따라서 조금 달라진다. 

혼자 왔을 경우에는, 질문을 해 본다. "죄송하지만 혹시 이런 약을 전에도 드셔 보신 적 있으실까요?" 

의사에게 병력/약력을 공유해 주는 것과는 달리 약사에게 히스토리를 공유해 주는 것을 개인 프라이버시 침해로 느끼는 분들이 종종 계시기 때문에 이 질문은 굉장히 조심스럽게 물어봐야 한다. 

만약 복용 경험이 없고, 사후피임이 실패할 가능성이나 이후 임신에 악영향이 있을지 등에 대해 불안해 하는 경우에는, 최대한 안심시켜 주려고 노력한다. 물론 병원에서 원장님이 충분히 설명해 주셨겠지만, 있을 수 있는 일이고, 일반적으로는 한 번의 복용으로 큰일이 나는 것은 아니라는 것, 컨디션도 기분도 힘들 수 있으니까, 약 먹고 몸을 잘 쉬어 주라고, 다음 번에는 이렇게 복용할 일이 생기지 않도록 주의하자고, 그렇게 얘기한다.


상대 남자분과 같이 왔을 때에는, 그래도 두 사람이 대기하면서 서로 웃고 포옹하고 농담을 할 정도로 여자분이 마음이 좀 더 편안해 보이는 경우가 많다. 싸우는 경우는 거의 보지 못했다. 이미 같이 온 것 자체가 두 사람의 관계의 온도를 보여준다. 책임감 때문일까, 결제도 남자분이 해 주고, 복약지도도 같이 들으러 투약구 앞에 나란히 서서 귀를 기울인다. 그럴 땐!!! 이 질문이 나오지 않도록!!!  입을 잘 틀어막아야 한다.


"혹시 이 약 전에 드셔 보신 적 있으세요?"


이 말 한마디로 알콩달콩했던 분위기는 순식간에 정적에서 싸늘함으로 바뀔 수 있다. 이미 먹어본 약이더라도 여자분이 아니요 처음인데요 이게 뭔가요 설명좀. 이라고 빠르게 대답한다면 그나마 다행이지만, 잠깐 머뭇거린다거나, 혹은 아무 고찰 없이 아 네 먹어봤어요! 잘 알아요 그냥 주세요~ 평소 약 받을 때 습관처럼 반사적으로 이렇게 말해 버린다면 상황은 걷잡을 수 없이 빠르게 나빠진다. 보통은 지금 같이 나란히 서 있는 남성 때문에 먹어봤던 것이 아닐 것이므로.. 그 순간 그 남성은 명확한 대상 없는 분노 속으로 빠져들고 말 것이다..


특히 처방 기록이 남아 있는 경우 기록이 보인다고 해서 "OOO님 예전에도 이거 드셨네요, 이 약 잘 아시죠?" 라고 말한다면 그건 정말 최악의 상황일 거다. 남자분과 같이 왔을 때, 절대로 절대로 과거 약력을 얘기해서는 안된다. 

드셔 보셨냐는 질문은 금기, 아예 저 목구멍 깊은 곳 안에 꽁꽁 가둬두고, 대신 복약 지도 중 일부러 특정 부분을 강조해 주는 편이 나을지도 모른다.


몸과 마음이 많이 힘들 수 있어요(남자분을 함께 바라보며 얘기하는 것이 포인트), 오늘 편안한 마음으로 잘 쉬어 주셔야 합니다. 다음에 또 복용하는 일이 가급적 없으셔야 해요.


뭐 이런 상황이 발생하는 것이 늘 남성분만의 잘못은 아니겠지만,

서로의 실수로 인해 한 사람만이 힘든 상황에 대해서는 미안함과 책임감은 최소한 공유했으면 해서,

일부러 여성분이 힘들 수 있는 부분을 더 강조해서 설명해 주려 하게 되는 것 같다. 너무 개인적인 의견이 개입되어 있는걸까?

 



원치 않는 상황으로 인해 이 약을 복용하는 일은 절대, 절대로 있어서는 안 된다.

그러나 사랑하는 사람 또는, 최소한 마음을 서로 나누는 사람과의 행복한 시간에 대한 대가로 이 약을 먹는 일 또한 생겨서는 안 된다고, 지금에서야 생각한다. 다만 실수가 벌어졌을 때에는, 한 달간 전전긍긍하며 불안과 우울함으로 상대를 원망하고 자신을 자책하며 시간을 보내지 말고 상대방과 함께 병원을 찾아 필요에 따라 Plan B, 사후피임약을 처방 받는 것이 더 나은 선택일 것이다. 혼자서 앓지 않기를. 다들 건강하게 사랑하고, 편안한 마음 가운데 행복했으면 좋겠다.




사후피임약이란?

사후피임약(응급피임약, emergency contraceptive pills)은, 성관계 후에 응급으로 복용하여 인위적으로 임신 가능성을 낮추는 약물로, 배란과 착상을 억제하는 작용을 하는 호르몬을 몸에 고농도로 때려 넣음으로서 임신이 이루어지지 않게 한다. 외국에서는 'morning after pill', 'plan B'라고도 불린다. (실제 제품명으로 plan B가 사용되고 있기도 하다). 수 틀렸을 때 복용한다는 뜻이겠지. 

국내에서 가장 많이 처방되는 사후피임약. 왼쪽이 울리프리스탈 제제, 오른쪽이 노레보원. (출처: 현대약품)
계획에 없던 일이라면, Plan B로 갑시다.


머시론, 마이보라와 같이 '사전에 복용하는' 피임약은 사후 피임 목적으로 사용될 수 없고, 사후피임약은 낙태 목적으로 사용될 수 없다. 이미 정자와 난자가 만나 자궁내막에 착상이 이루어진 경우에는 사후피임약의 효과가 없다.


어떤 약을, 언제 복용해야 하나?

시판되는 사후피임약의 성분은 두 가지이다. 레보노르게스트렐이라는 황체호르몬과, 울리프리스탈(ulipristal)이라는 프로게스테론 수용체 조절제가 있다. 레보노르게스트렐 제제는 관계 후 72시간(3일) 이내 복용시 효과가 있으며, 대부분의 제품이 여기에 속한다(노레보원, 포스티노, 72H, 레보니아원 등) 울리프리스탈은 관계 후 120시간(5일) 이내 복용시에도 효과가 있으며, 엘라원이라는 제품이 국내에서는 유일하다. 그러나 72시간이건 120시간이건, 늦어도 그 안에 복용해야 한다는 이야기이고 사후피임약은 관계 후에 최대한 빠르게 복용하는 것이 가장 효과가 좋다.


사후피임약의 부작용(이상반응)은 어떤 것이 있나?

레보노르게스트렐 제제의 주요 부작용은 울렁거림, 두통, 어지러움, 복통, 월경주기 변화, 다량의 월경 등이 있지만, 울렁거림과 같은 이상반응은 2일 이내에 사라진다. 울리프리스탈(엘라원) 제제의 경우 무월경, 자궁내막 비후, 가슴(유방)통증, 여드름, 기분변화 등이 나타날 수 있다.


사후피임약을 복용한 후에는 안심해도 되나?

레보노르게스트렐의 경우 72시간 이내 복용했다면 피임이 성공할 가능성은 약 90%다. 울리프리스탈의 경우 120시간 이내 복용시 임신할 확률이 2% 정도로 보고됐다. 최대한 빨리 복용했다면, 보통은 걱정 안해도 된다는 얘기다. 다만 사후피임약으로 모든 임신을 막을 수 있는 것은 아니므로 의심스러운 경우에는 반드시 산부인과에서 진단을 받아야 한다. 만에 하나 사후피임약 복용에도 불구하고 임신이 되었다 하더라도, 그로 인해 임신 및 태아에 미치는 직접적인 악영향은 거의 없다.

사후피임약 복용 후 다음 월경 주기가 정상적으로 시작될 때까지는 국소적인 피임법을 사용해야 한다(콘돔). 


자주 복용해도 괜찮을까?

한 달에 2회 이상 복용하는 것은 체내 호르몬 농도를 비정상적으로 높이고 월경 주기에 심각한 장애를 미칠 가능성이 있으므로 피해야 한다. 

한때 사후피임약을 자주 복용하는 여성은 자궁외임신의 가능성이 높아진다는 이야기가 있었으나 최근의 연구결과들에 따르면 사후피임약의 복용이 자궁외임신의 빈도를 높이지는 않는 것으로 나타났다(레보노르게스트렐).  다만, 자궁외임신의 가능성이 기저에 있는 경우에는 사후피임약의 투여를 피하는 것이 안전하다. 


*당연한 이야기지만, 사후피임약이 성병을 예방해 주지는 않는다. 콘돔을 쓰도록 하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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