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필더필즈 Apr 03. 2021

엄마를 보내고, 딸은 제약회사 직원에게 전화를 걸었다

환자 지원 프로그램(EAP)에 관한 기억

3년 전, 나는 한 외국계 제약회사의 항암제 부서에 근무하고 있었다.

담당품목은 폐암 치료제로서, 미국에서는 허가를 받은 제품이었지만 아직 국내에서는 식약처 허가 및 시판이 되지 않은 제품이었고, 우리 부서는 이 품목이 국내에서 허가를 받아 원활히 사용될 수 있게 만반의 준비를 하는 중이었다.




나에게 중요도가 높았던 업무 중 하나는, 흔히 'NPP(Named patient program)', 'EAP(Expanded access program 또는 Early access program)'라고 불리는 환자 지원 프로그램을 운영하는 것이었다. EAP는 '동정적사용승인제도'라고 불리기도 하는 제도로, 아직 허가를 받아서 공식적으로는 사용이 불가능한 의약품이더라도, 의료당국(식약처 관련 부서 또는 산하기관)으로부터 각 건마다 개별적인 승인을 받아 치료제를 무상으로 지원받을 수 있도록 하는 프로그램이다. 보통 암이나 희귀질환과 같이 위중하고, 사용할 수 있는 치료 옵션이 더 이상 없는 질환의 경우에 한해 운영되고 있다. (여기에 소요되는 치료제의 비용은 모두 제약회사가 부담한다.)


우리 회사에서 항암제 EAP 자체를 시행해 본 전력이 없어 처음으로 길을 닦느라 고생을 많이 했다. 식약처 담당부서와 희귀의약품 센터에 엄청나게 많은 문의전화를 했고, 나중엔 희귀의약품센터 선생님들의 내선번호를 모두 외울 지경이 되었다. 그런 와중에 수시로 폐암환우 카페를 들어가 보기도 했는데, 곧 출시될 우리 제품에 대한 기대글들을 심심치 않게 볼 수 있었고, EAP에 대한 기대감들도 엿볼 수 있었다. 그런 글을 볼 때면 내가 맡은 일의 무게감이 더더욱 크게 느껴져, 프로세스를 더욱 빠르게 진행하기 위한 방법을 고민하곤 했다.


 프로그램의  대상자는 서울 소재 대학병원의 30 후반 환자로, 앞서 다른 치료제들을  사용해 보았지만 결국 실패한 케이스였다.  치료제가 미국에서 발송되어 인천공항에 처음 들어오던 순간은 아직도 잊을  없다. 수입요건면제확인서를 제출하고, 얼마  되어 해당 병원에 약이  도착했다는 연락을 받았을  그냥 모든 것이  감사하게 느껴졌다. 다행히 환자분은 항암화학요법을 받으며 질병이  진행되지는 않았던 상태라  문제 없이 신약 치료를 시작할  있게 되었다. (그리고  환자분은 1 넘게 치료를  받으셨다고 한다.)



그리고 그렇게 첫 번째 약이 도착한 날 오후, 사무실로 전화 한 통이 걸려왔다.

차분한, 그렇지만 앳된 목소리의 여자아이였다. 고등학생 아니면 이제 막 스무살이나 되었을까 싶은 목소리였다.


저희 엄마가 ALK 양성 폐암이신데요...


모든 치료를 다 시도하고 결국 실패해서, 더 쓸 약이 없던 차에 환우회 카페에서 우리 제품에 대한 소식을 들었다고 했다. 아이는 이미 폐암에 대한 웬만한 지식을 다 알고 있었다. 엄마는 표적치료제로 치료해야 한다고 들었는데, 이미 시판된 표적치료제 3개에 다 실패했어요, 차근차근 그간의 치료과정을 내게 설명했다. 이미 뇌와 간으로 전이가 많이 된 상태라 예후가 좋지 않지만, 그래도 꼭 이 치료제라도 엄마에게 써 보고 싶다고 말했다. 아이는 단단해져 있었다. 울먹이거나 하는 기색은 없었다. 어려울 것 같지만 이렇게라도 시도해 보지 않으면 많이 후회할 것 같아요, 라며 꼭 부탁드린다고 했다.


아이와 엄마는 제주도에 살고 있었다. 제주 소재 대학병원에 있는 담당 교수님과 논의를 시작했다. 담당 교수님은 체념하신 것 같았다. 쓴다고 나아질지 모르겠습니다.. 이미 심각하게 전이가 되어 당장 다음주를 넘길거라 예상하기 어려운데 약이 배송되는 그 기간을 환자가 견딜지 모르겠습니다. 괜히 회사에서도 헛수고 하시는 게 아닌가 싶습니다..


선생님은 세 시간 정도를 더 고민하시고 다시 연락을 주셨다. "그래도 보호자분이 강력하게 원하시니 회사에서 가능하시다면 진행해 주시면 좋겠습니다."


의약품 사용 승인을 받기 위해, 먼저 해당 환자분의 신분증 사본과 신청서를 받았다. 환자분은 40대 후반의 여성이었다. 신분증 사본을 통해 환자의 이름과 얼굴을 이렇게 직접 마주하게 되면, 책임감이 더 강해진다.


그 날부터 정말 모든 프로세스를 단축시키기 위해 엄청나게 뛰어다녔다. 퀵으로 배송을 여러 번 해야 하는 서류 처리의 경우 아예 직접 희귀의약품센터에 찾아가 그 자리에서 모든 서류 작업을 마쳤다. 미국 본사에도 최대한 빠른 배송을 요청한다고 여러번 얘기했다.

 

문제는 환자가 제주도에 있다는 거였다. 인천공항에 도착한 약을 제주도로 가장 빠르게 배송해 줄 항공택배업체를 미리 수소문했다. 며칠 뒤 인천공항에 약이 도착했고, 나는 미리 찾아 둔 택배 업체에 연락을 취했다. 약이 인천에서 출발했고, 이제 곧 제주도에 도착할 터였다. 환자 분, 조금만 기다려 주세요...! 뿌듯함과 기대감이 섞인 감정으로 빨리 제주도에서 연락이 오기만을 바랐다.


그날 오후 3시경, 회의실에서 한참 미팅을 하던 중이었다. 노트북 모니터 우측 하단에 제주대학병원 교수님으로부터 메일이 왔다는 팝업이 떠올랐다. 와, 약이 도착했구나, 이제 환자분 내일 치료 시작하실 수 있겠구나, 두근거리는 마음으로 살짝 메일을 클릭했다.




그러나 아웃룩 창에 뜬 메시지는 나의 기대와는 완전히 다른 내용이었다.



<환자 분 오늘 오전 expire(사망)하셨습니다. 수고해 주셨는데 죄송하게 되었습니다.

조금 전 약이 도착했는데 이 약은 어떻게 처리하면 될지 절차를 알려 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


........



머리 속에 전자음이 삐- 들리는 듯 했다.

뭐라고 해야 할지, 내가 조금만 더 노력했다면 달라질 수 있었을지, 정말 하루만 더 앞당겼으면 달라졌을지..



바로 회신을 드리지 못하고,  내 자리에 돌아가 메일을 쓰기 시작했다.

<약을 조금 더 빨리 전해 드리지 못해 죄송합니다. .......약은 원내 임상시험약국 폐기 절차에 따라 폐기를 진행해 주십시오.>




며칠 뒤 사무실로 다시 전화 한 통이 걸려왔다.

눈에 약간 익은 전화번호. 수화기를 들자 다시 얼마 전의 그 앳된 목소리가 들려왔다.


저... 들으셨죠, 저희 엄마 발인 마치고 연락 드렸어요....
정말 감사해요. 노력해 주셔서 정말 감사해요.





말문이 턱 막혔다. 더 빨리 드리지 못해 죄송해요, 라고 말하려는 목소리가 목구멍 밖으로 자그맣게 새어나왔다.


그 슬픔 중에 나에게까지 전화해서, 이런 상황에서 나에게 고맙다고 말하는 이 아이의 심정을 어떻게 헤아릴 수 있을까. 나는 뭐라고 말해야 할까.  고생 많이 하셨어요.. 그 뒤의 대화는 잘 기억나지 않는다. 1분이 채 되지 않는 짧은 통화였던 것 같은데, 가슴이 먹먹해진 채 수화기를 내려놓았다. 그리고 화장실로 달려가 엉엉 울었다. 감사 인사를 전하던 아이의 목소리와 신분증 속 사진에서 만난 아이 엄마의 얼굴이 겹쳐지며 마음을 더 강하게 때렸다. 미안해요. 미안합니다.... 지금 생각해 보면 난 누구에게 더 미안했던 걸까. 생을 마감한 환자 분에게의 미안함일까, 엄마를 보내는 아픔을 겪어야 했던 보호자(딸)일까. 정확히 뭐가 미안한지도 모른 채 나는 그렇게 한참을 울었다.



다행히도 환자의 사망 소식을 접한 것은 그 때가 마지막이었고, 대부분은 치료제에 잘 반응해 6개월 이상 치료를 지속할 수 있었다. 이제 막 스물 다섯이 된 남성 환자도 있었는데, 아이의 아버지는 명절이나 크리스마스 같은 날이 될 때마다 아이가 덕분에 잘 치료를 받고 있다고 문자를 보내 주시기도 했다. 감사한 일이었다. 그렇지만 또 혹시라도 어느날 갑자기 좋지 않은 소식이 들려올까봐, 핸드폰에 보호자분들이 문자를 보내셨다는 알림이 뜰 때마다 늘 가슴이 철렁 내려앉곤 했다.



이 프로그램을 진행하면서 환자 분들과 직접 이야기를 나누기보다는 보호자 분들의 이야기를 듣는 일이 더 많았다. 사랑하는 가족, 배우자의 투병 생활을 함께 하는 보호자는 환자만큼이나 힘든, 어쩌면 정신적으로는 환자보다도 더 힘들지도 모를 그런 시간을 보내는 것 같다. 보호자 분들의 이야기를 듣다 보면, 이 분들은 스스로를 강하게 만들기 위해 정말 엄청나게 노력했구나, 사랑하는 사람을 지키기 위해 이렇게 단단해졌구나 하는 것이 느껴져 마음이 아려오곤 했다.


환자와 보호자는 서로에게 미안해하며 나란히 고통의 시간을 걷는다. 누구의 아픔이 더 크다고 감히 말하기가 어렵다.



지금은 더 이상 회사를 다니지 않아 그렇게 큰 규모로 환자와 보호자들에게 도움을 주고 있지는 못하지만, 약국에서도 환자 보호자들과 상담을 하다 보면 때때로 그 때의 일화들이 떠오른다. 그 때 지원을 받았던 환자분들과 보호자들은 지금 다 어떻게 지내고 계실까. 그 프로그램으로 인해, 그들이 함께 하는 행복한 시간이 조금이나마 늘어났을까. 내가 지금 서 있는 약국이라는 자리에서나마, 환자와 보호자들의 마음을 조금이라도 보듬어 줄 수 있었으면 좋겠다. 그리고 환자와 보호자들을 위해 노력하는 모든 분들에게 존경의 마음을 보낸다.



환자와 보호자들을 위해 노력하는 모든 분들에게 존경의 마음을 보낸다.


덧붙임. 제약회사 하면 많은 사람들은 '제약회사의 진실', '제약회사의 음모' 같은 키워드를 연상하며 인류의 건강을 미끼로 돈을 쓸어담는 집단이라고 생각하는 경우가 많은데, (극단적이고 자극적인 컨텐츠로 해당 주제를 다룬 책들이 많이 출판된 탓이리라) 한편으로는 정말 환자 한명 한명을 살리는데 도움이 되고자 노력하는 그런 사명감을 가진 기업들도 많음을 알아 주면 좋겠다.
이전 01화 그러니까 이것은, 약에 대한 이야기들이다.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