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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필더필즈 Aug 09. 2020

탈모가 있는 손님에게 설레 버렸다

약국에서 이루어진 작은 싸인회

강남의 여러 피부과 및 성형외과들 사이에 크게 자리한 약국에서 근무하던 때가 있었다. 


그 전까지 일했던 약국에서 했던 업무는 주로 내과 장기 처방(혈압약, 고지혈증약, 당뇨약 등)이나 감기약, 진통제, 산부인과 약, 정신과 약 등 실제 신체와 마음의 기능에 문제가 생긴 경우를 위한 조제가 대부분이었다면, 강남 한복판에 위치한 약국에서의 업무는 주로 신체의 익스테리어, 막말로 와꾸를 가꾸고 바꾸고 메꾸는 데 필요한 조제가 대부분이었다. 


그 중 약 20%를 차지했던 중요한 테마는 바로 '탈모약'. 정확히 말하자면 탈모가 우려되는 사람들이 탈모 진행을 예방하기 위해 복용하거나 모발 이식 수술 후 유지를 위해 복용하는 약제였다. 

헤어스타일의 중요성


그런데 의외로 탈모약 처방을 받으러 오는 이들의 대부분은, 20-30대의 남성 분들로서 외모에 남들보다 더 신경을 쓰는 것처럼 느껴지는 경우가 많았고, 뚜렷하게 인지될 만한 탈모 증상이 보이지 않는 경우가 대부분이었다. 


보통은 기존부터 복용해 온 약제이다 보니 특별한 추가 설명을 필요로 하지 않는 경우가 많았고, 한번에 6개월 이상의 복약분을 받아가는 것이 일반적이라 아예 들어올 때부터 넉넉한 백팩을 메고 오는 분들도 많았다. 백팩을 안 들고 오신 경우에는 가급적이면 나도 겉이 튼튼하고 약국 티가 잘 나지 않는 쇼핑백에 담아 드리곤 했다.  


잠시 처방 탈모약에 대해 짚고 가자면,

처방약 기준으로 시장에서 가장 잘 알려진 약제는, 오리지널 약 기준으로 1. 프로페시아(성분명 피나스테리드) 2. 아보다트(성분명 두타스테리드)가 있다. 남성분들이라면 탈모 여부에 관계 없이 흔히 들어봤을 만한 이름들이다.  


두 약제 모두, 탈모를 일으키는 원인이 되는 남성호르몬을 생성하는 5-알파환원효소의 저해제(5-alpha reductase inhibitor)이며, 프로페시아가 이 효소의 1가지 타입을 억제하는 데 반해 아보다트는 2가지 타입을 억제하므로 효과와 부작용 측면에서 장단점이 있다. 프로페시아로 효과가 충분치 않았던 경우 아보다트로 전환하는 경우도 많고, 몇 가지 임상 연구를 근거로 하여 M자 탈모가 심한 경우에는 처음부터 아보다트를 복용하는 경우가 많다.  


아보다트 연질캡슐, 글락소스미스클라인
프로페시아 정, 한국엠에스디

두 약제가 모두 오리지널 약제이다보니 제네릭(카피약)에 비해서는 가격대가 높아서, 요즘은 제네릭 처방이 더 많이 이루어지기는 한다. 주로 "피나~" 등으로 시작하는 이름은 프로페시아 카피, "아보~", "두ㅌ~" 등의 이름이라면 아보다트 카피라고 보면 된다. 

참고로 피나스테리드, 두타스테리드 모두 원래는 전립선 비대증 치료제이다. 그러나 피나스테리드의 부작용으로서 모발이 자라나는 것이 확인되면서 이후 용량 조절을 통해 탈모에도 사용하기 시작한 것. 전립선비대증에 사용되는 피나스테리드의 용량은 5mg, 탈모에 사용되는 피나스테리드의 용량은 1mg이다. (두타스테리드는 0.5mg로 동일하다) 가격적인 문제 때문에 일부 병원에서 피나스테리드 5mg 정제를 1/4로 분할해서 처방하는 경우도 있는데, 이는 허가사항에 맞게 처방한 것이 아니기 때문에 원칙적으로는 이렇게 처방해서는 안 된다. 특히 여성의 경우 해당 약 성분에 노출될 경우 태아에 기형을 유발할 수 있기 때문에 가임기 여성 약사에게 해당 약제를 분할하거나 분쇄하도록 해서도 안된다. 

이들 약제를 복용한 후 성욕감퇴나 발기부전 등의 이상반응을 우려하는 경우가 많다. 그러나 임상시험에서는 2-3% 정도에서 발현된 사례이고, 가역적인 반응이기 때문에 약을 중단하면 다시 회복되는 것이 일반적이다. (중단 후에도 발기부전이 지속되는 경우가 1% 미만에서 발견되었다.) 만약 이러한 부작용으로 인해 삶의 질이 많이 떨어질 경우, 심혈관계에 특별한 문제가 없다면 비아그라(실데나필) 등을 함께 병용함으로써 도움을 받을 수 있다.


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도 프로페시아를 장기 복용해 왔다. © AFP=뉴스1




어느 여름날, 약국이 바쁘지 않은 시간대에 잠시 멍을 때리며 약국 입구를 초점 없이 바라보고 있었는데, 갑자기 시야에 들어온 검은 피사체에 초점이 잡혔다.  


응? 까맣고 어두운데 환한 이 느낌 뭐지? 


이제 막 약국으로 들어온 남성은 검은 모자, 검은 무지 반팔티에 검은 츄리닝 바지, 검은 슬리퍼를 착용하고 있었다. 그런 평범한 차림의 등장만으로 약국 안이 환해진 느낌이 드는 것이 참으로 이상했다.  

그리고 그가 내민 처방전을 보고서야 깨달았다. 그는 유명 배우였다! 


나는 처방전에 적힌 그의 주민번호를 입력하며 그의 실제 나이를 깨닫고 잠시 흠칫했고, 그의 처방전에 적힌 약이 탈모약 6개월분임에 다시 한번 흠칫했다. 뭔가 한 연예인의 은밀한 프라이버시를 본의 아니게 침해한 느낌? 


긴장한 나는 처방전을 입력하면서 컴퓨터 너머로 흐릿하게 시야에 들어오는 그의 검은 실루엣에 대고 물었다.

"원래 드시던 약이실까요?" 그는 환하게 웃으며 대답했다. "네, 계속 먹던 약입니다." 


쿨하디 쿨하다. 저 한마디에 멋짐이 폭발한다. 탈모약을 투약하며 이렇게 설레본 적이 있던가.  


조제실로 들어가 6개월분의 탈모약을 챙기며, 지금 내 모습이 너무 흉하지는 않은지, 설레서 인중에 땀 맺힌 건 아닌지,  거울 속 얼굴 상태도 한번 체크하고, 약을 건네는 손에 혹시 뭐라도 묻어 있지 않도록 손도 꼼꼼하게 체크하고, 가운 깃이 제멋대로 구겨져 있는 상태는 아닌지 핏도 체크하고, 그리고 나서야 약을 들고 투약대로 나갔다. 


"잘 아시겠지만 약 드시는 동안 헌혈하시면 안 되고요, 여성 분이 만지지 않도록 주의해 주세요. 드시면서 다른 불편한 건 없으셨지요?"  /  "아 네." (웃음) 

뭔가 별빛이 내린다 BGM을 로딩해 줄 것 같은 그의 미소에 나는 또 인중에 땀이 배는 것을 느꼈다. 


이제 투약은 끝났으니 계산 후 그를 보내줄 시간이 되었다. "6개월분 XX,XXX원 입니다." 

그가 내민 카드를 단말기에 꽂고, 곧이어 들리는 삑 신호에 맞추어, 나는 수줍게 요청했다.  


"저....., 여기 싸인 좀 해 주세요." 


순간 그는 반사적으로 펜을 찾는 듯 했지만

곧 어디에 서명을 요청한 것인지를 깨닫고, 단말기 서명판 위로 몸을 굽혀 매우 정성스럽고 멋드러지게 싸인을 해 주었다. 그의 싸인을 담은 영수증이 출력되었고, 그는 영수증을 챙겨갔다. 


아쉽다. 

영수증을 버려 달라고 했다면 그 싸인을 고이 보관했을텐데. 


곧이어 약국의 자동문이 열리고, 화사한 여름 햇살 속으로 그는 퇴장했다.

그의 등장으로 순식간에 무대이자 세트장이 되었던 약국은 그의 퇴장과 함께 다시 보통의 약국으로 돌아왔고, 나도 모르게 인중에 맺힌 땀을 닦으며 나는 다시 한번 포털사이트에서 그를 검색해 보았다. 


그리고 검색 버튼을 누르기도 전에 뜬 연관검색어, "탈모". 

이어서 화면에 나타나는 그의 탈모와 관련한 각종 갤러리의 응원글. 


아아....그는 이미 탈밍아웃을 완료하고 천만 탈모인과 희로애락을 함께 해온 이였던 것이다.

그의 당당하고 쿨한 모습이, 핸드폰 속 그의 환한 이마 사진 위로 다시 한번 오버랩되었다.   


6개월 후 그가 또 처방전을 들고 방문하지 않을까 기다렸지만, 그 이후로 나는 그를 다시 만날 수 없었다. 

그러나 일년이 지난 지금도, 검은 모자 아래 환하게 빛났던 그의 미소가 뚜렷하게 기억난다. 


그에게 전하고 싶다. 어떤 부분은 덜 풍성하셨을지 몰라도,

당신은 제가 약국에서 만난 손님들 중에 가장 풍성한 아우라를 지닌 분이셨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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