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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필더필즈 Apr 10. 2021

그러니까 이것은, 약에 대한 이야기들이다.

어릴 때의 나는 예술가가 되고 싶었다. 음악을 하고 싶어했고 글을 쓰고 싶어했다. 당시 텔레비전 어느 채널을 켜도 볼 수 있었던 주영훈처럼 노래도 잘 하고 곡도 잘 쓰는 싱어송라이터가 되고 싶었다. 친구들과 레이블 비슷한 걸 만들어서 케이크워크로 미디 파일을 만들고 노래를 얹어 부르고 미디파일을 다운로드할 수 있는 홈페이지를 만들었다. 하지만 어쩌다 보니 인문계 고등학교의 이과 지망 학생이 되었고, 어느 날 화학 시간, 버드나무와 아스피린 이야기와, 한국 최초의 신약과 개량신약이 나란히 등장하는 대목에서 약학에 마음을 두게 되었다. 아니 뻥이다. 사실은 그 이야기들이 나오는 페이지의 하단에 있는 총천연색 알약 사진에 마음을 뺏겨서, 단순히 그 사진이 예뻐서 약학을 공부하고 싶어졌다. 나는 원래 그렇게 충동적이고 밑도 끝도 없이 엉뚱한 곳으로 새는 애였다.


약대를 준비하면서, 당시 막 출시되었던 자궁경부암 백신(가다실)의 개발에 참여한 주요 공신이 재미교포 김신제 박사님이시라는 걸 알게 됐다. 같은 한국인 여성으로서의 자긍심에 취해, 한참 가다실 개발 스토리를 뒤져 보게 되었다. 어느 추운 겨울, 국내 최고의 약대 건물에서, 국내 최고의 교수님들 앞에서 나는 겁도 없이 당당하게 포부를 밝혔다. 김신제 박사님처럼 이 세상에 꼭 필요한 백신을 개발하는 사람이 되고 싶습니다. 그리고 거짓말처럼 7년 뒤 나는 제약회사 사무실에서 자궁경부암 백신 관련 ppt를 개발하고 있었다. 백신을 개발한 건 아니지만 뭔가 백신과 관련해서 세상에 도움이 되는 일을 하긴 한 것이다.


여러 병원, 제약회사를 옮겨다니며 약사로서, 약학을 전공한 사람으로서 참 열심히도 일했다. 그 동안에 스스로 몸과 마음의 병도 많이 앓았다. 결국 번아웃이 심하게 와서 세 번째 회사를 때려치우고 백수가 되기로 했다. 하지만 그렇게 대범하지는 못해서 백수는 포기하고 파트타임 약사로 이 약국, 저 약국에서 근무하며 많은 환자들을 만났다. 사실 약리학적인 내용보다는 병원에서, 약국에서 사람들의 마음에 더 관심이 있었다. 훌륭하고 똑똑한 약사는 아닐지 몰라도, 몸이 아파서 마음까지 지친 사람들에게 언제든 따뜻한 약사이고 싶었다.


벌써 약사 라이센스를 딴 지 10년이 넘었다. 뒤돌아 보니, 그 동안 내가 어떤 방식으로든 - 내가 먹든 남에게 조제해 주든 설명해 주든 -, 접하고 다뤄 왔던 약들에 얽힌, 따뜻한 때로는 마음 아팠던 기억 조각들이 소복이 내려앉아 있었다. 설탕가루가 곱게 붙은 마름모꼴 박하사탕을 보면 어린 시절 우리 할머니가 내게 사탕을 쥐어주던 장면이 생각나듯이, 어떤 약을 보면 나는 특정한 순간들과 특정한 사람들과 그 때의 감정들이 떠오른다. 그 마음들을 잊고 싶지 않아서 머리 속에서 슬그머니 기억들이 고개를 내밀 때마다 반가운 마음으로 기록을 남기기로 했다.


그러니까 이것은, 약에 대한 이야기들이지만 또 약과는 별 상관이 없는, 마음에 대한 이야기들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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