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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클로이 Sep 22. 2015

제주의 사계절

겨울 그리고 봄

  오래전 만났던 그가 내게 한 말이 있다. 사람은 적어도 사계절은 겪어봐야 알 수 있다고. 그가 했던 대부분의 말들은 잊어버리거나 퇴색되었지만 그 말만큼은 선명하게 기억이 난다. 그와 보낸 계절이 늘어갈수록 그에 대한 의문도 늘었기 때문에 결국 우리는 서로를 알지 못한 채 이별했다. 그와 헤어지고 나서 얼마 되지 않아 떠난 곳이 제주도였다. 한 겨울의 제주도는 백색의 섬이었다. 소복하게 쌓인 눈 위로 첫 번째 발자국을 찍으며 마냥 걸었다.

처음으로 등반했던 한라산. 정상에서 라면과 한라봉 먹는 기분이란. 신선이 된 것 같은 기분.

  돌아오는 비행기 안에서 그의 말이 떠올랐다. 제주도의 사계절을 모두 느껴보고 싶었다. 그제야 제주도를 조금 안다고 말할 수 있을 것 같았다. 돌아오자마자 다시 떠날 채비를 했다. 그리고 봄을 기다렸다. 물론 쉬운 일은 아니다. 시간적, 금전적 여유가 많지 않은 사람에게 여행은 현실을 벗어나야만 이룰 수 있는 이상일지도 모른다. 그 당시의 나는 그것들이 핑계에 불과하다고 믿는 패기가 있었다. 그래서 떠난 두 번째 제주도. 봄의 제주도.

상공에서 찍은 사진들은 언제 봐도 설렌다.

  바람이 많이 불었던 초봄. 유채꽃이 필 무렵에 두 번이나 제주도를 찾았다.  스물다섯의 봄과 서른의 봄은 분명히 달랐다. 계절과 풍경은 변함이 없었지만 제주도를 대하는 나의 자세는 많이 달랐다.

스물 다섯의 봄, 제주도, 유채꽃

  남겨놓은 사진들 속의 얼굴과 배경은 화사했다. 근심과 걱정은 유채꽃밭 어딘가 고이 묻어둔 듯 즐겁기만 했다. 경관보다는 사람들과 함께 먹고 즐긴 것들이 많이 담겨 있었다.

제주도 필수 관광코스 섭지코지

  속성으로 관광하는 기분이 들었다. 사람이 많아서일까. 짧은 일정 때문이었을까. 바다를 천천히 둘러보지 못했다. 그래도 마음만은 뿌듯했다. 봄의 제주도는 바람이 잦아도 따뜻했다. 불과 몇 개월 사이 제주도의 풍경은 많이 달라져있었다. 얼었던 땅이 녹고 그 속에서 잠들어 있던 생명들이 하나 둘 고개를 들었다. 다시 봄이 올까 의심했던, 유난히도 추운 겨울을 지난 봄이었다. 축축했던 마음도 조금씩 아물어갔다.

서른의 봄에 찾은 제주도

  시야가 조금 더 넓어졌다고 해야 할까. 내가 아닌 풍경과 풍경 안에 담긴 사물들에 시선이 많이 가는 여행이었다. 가장 친한 친구와 함께 가장 한가한 시간을 틈타 떠났던 여행이었다. 어정쩡하고 불안한 서로의 상황을 위로했던 여행. 많은 말이 오가지 않았다. 때로는 상투적인 위로의 말보다 침묵이 더욱 진정성을 가진다. 우리는 울고 웃다 잠이 들었다. 




  계절의 시작은 봄이라 생각하는 게 일반적이다. 하지만 엄연히 새로운 해의 시작은 1월이고 1월은 겨울의 중심에 있다. 어쩌면 겨울에서 봄으로 이어지는 시간이 가장 설레는 순간일지도 모른다. 내가 사랑했던 제주도의 절반은 그 시간 속에 있다. 깊숙한 곳에 스며든 부정적 감정들을 치유할 수 있는 가장 좋은 방법이 여행이다. 맡았던 향기와 볼에 닿는 바람까지 아름다웠던 제주. 굳이 멀리 가지 않아도 충분히 낯설고 새로운 기운을 얻을 수 있는 곳으로 단연 으뜸인 곳. 사진을 보니 다시 떠나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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