결론적으로 당신은 양보의 크기가 비슷한 사람과 만나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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흔한 예를 들어보자. 한 친구는 약속시간에 이삼십 분 정도 늦는 것에 대해 아무렇지 않게 생각하는 사람이고,
한 친구는 10분만 늦어도 큰 배신감을 느끼는 사람이다.
대개 이런 기준은 겨우 일이 년 정도의 생활 경험을 기반으로 만들어지지 않는다.
평생에 걸쳐 학습해온 생활습관이 녹아난 가치가 반영된 것이라 보면 된다.
같은 상황을 마주해도 한 명은 "겨우 이 정도 늦은 것 가지고 그래!" 또 다른 한 명은 "10분씩이나 늦어? 날 너무나 무시하는데?"
라는 전혀 다른 반응을 보이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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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간극은 단순한 노력으로 개선하기 쉽지 않은 부분이다.
가장 큰 문제는 연인 사이 에서다. 예를 들어 여자가 약속시간에 느긋한 사람이라면
남자 입장에서는 사랑하니까, 예쁘니까, 귀여우니까(?) 같은 여러 가지 이유를 기준으로
용서해줘야 하는 상황을 늘 마주하게 된다.
여자에게 [겨우 이 정도도 용서 못해주고 화내는 속 좁은 남자가] 되고 싶지는 않을 테니.
과한 양보를 "하는 쪽"은 이 상황을 마주할 때마다 자신이 무시받는듯한 느낌을 가슴속에 쌓아두게 되고,
양보를 "받는 쪽"은 이것에 익숙해져 애초에 큰 문제로 여기지 않게 된다.
이렇듯 한 가지 이슈에 대해 전혀 다른 논조를 가진 두 사람의 관계는 그 사이를 유지하는 것 자체가
한쪽에게 상처를 차곡차곡 쌓아가는 형태의 관계로 고착화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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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음의 상처로 고통받고 있다면, 누군가에게 너무 많은 일방적 양보를 하고 있을 가능성이 높다.
착한 머저리가 되느니, 이기적인 개새끼가 되는 게 행복에 더 큰 도움이 될 수도 있다.
양보 가능한 선이 너무나 다른 두 사람의 만남은 한쪽에게 일방적인 희생을 강요하게 된다.
그러므로 당신이 확인하고 결정해야 할 부분이 존재한다.
내가 양보한 만큼 이 사람도 나에게 양보하고 있는지.
혹은 상대가 가능한 양보의 크기가 나보다 작아도, 관계를 위해 그 양보의 크기를 늘려갈 의지가 있는지.
결국 여러 가지 이슈에 대해 열린 자세로 대화를 할 태도가 있는 사람이어야 한다.
그게 아니면 확인할 방법이 없으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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