모성애 10등급 시어머니 이야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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평범하게 사는 것이 내가 바라는 궁극적 삶의 목표이거늘 지난 두어 달 아니 그 보다 훨씬 전부터 매일이 평범한 듯 평범하지 않은 하루하루를 보내고 있다.
뭐 소소하게 큰 아이 공연도 보러 다녔고 매일 등산도 했고 이사도 했다. 이사를 위한 기본 입주청소며 기타 등등의 것들을 셀프로 하느라 어쩌면 굳이 평범을 거부하였는지도 모르지만 그런 일들은 아주 작은 해프닝에 불과할 뿐 내 삶에 큰 획을 그을 여러 사건들에 비하면 아무것도 아니다. 오랜만에 글 쓰는데 이런 에피소드 라니 좀 내키진 않지만, 이것부터 시작해야 마음에 쌓인 무언가가 내려갈 거 같다.
이사를 앞둔 며칠 전 갑자기 서울에 사는 시누에게서 연락이 왔다. 엄마가 아침부터 연락이 안 된다며 전화기가 계속 꺼져 있다고. 마침 나도 시 어머니와 약속 잡을 일이 있어 전화하려던 참이었는데 어라? 싸한데 싶다. 곧장 시어머니집으로 갔다. 카드키가 있어도 안에서 이중잠금을 해둔 터라 들어갈 수 없을 거라는 생각이 스치고 지나갔고 바로 아파트 관리실에 시시티브이 확인요청을 했다. 하루가 빤한 분이시라 점심 전후로 나간 기록이 없다면 백 프로 집안에 있을 것이라고 생각했다. 나간 흔적이 없다는 걸 확인하자마자 112에 신고했다. 불과 몇 분 만에 112, 119 모두 도착했고 탑층인 게 다행인 건지 옥상에서 밧줄을 타고 내려가서 문을 열 수 있었다.
" 며느님 들어오지 마세요"
화장실에 엎어진 채로 발견되었기에 어머니가 혹여나 잘못되셨을지도 모르니 안 보는 게 좋을 거란 배려였을 것이다. 하지만, 잠시 후 어머니의 외마디 비명이 들렸고, 곧바로 나는 이층으로 올라갔다. 변기와 욕조 사이에 몸이 끼인 채 온몸에 괴사가 시작된 듯 꽤나 오랜 시간 한 자세로 버텼을 어머니의 모습에 다행이다 싶은 마음이 들면서 다리에 힘이 풀려 버렸다. 혹시나 혹시나 별의별 생각을 다 하고 있었는데 적어도 초상 치르지 않은 게 어딘가.
나이도 있고 혼자 계시니 2층에서 살지 말고 1층으로 내려와서 살든지(시댁은 복층아파트다) 집을 팔고 작은 곳으로 옮기는 게 좋겠다고 말해도 고집불통이라 듣지를 않더니 결국 사달이 나고 말았다. 자식들에게 걱정을 끼치면서도 굳이 자기 편한 대로 살기를 원하는 분이기도 하고 고집을 꺾을 방법 또한 없어서 어쩌면 다들 그냥 그렇게 방치했는지도 모른다. 그래도, 안부전화에 한 달에 한 번씩 은행에 같이 가는 정도로 도리를 다하고 있다고 생각했는데 응급실에서 어머니 뒤치다꺼리를 하면서 다시 한번 '그래, 사람은 안 바뀌나 보다' 새삼 깨달았다.
이런 상황이 벌어져 자식들이 달려오고 며느리는 지린 변을 닦아내고 있는 와중에도 내 목걸이 내 팔찌 손대지 마라며 간호사들에게 고래고래 소리 지르는 모습을 보니 아이고 우리 어머니 천수를 사시겠네 헛웃음도 났다.
"어머니랑 나는 구급차 동지네요. 이게 몇 번째야" 농담이랍시고 어머니랑 그런 말을 주고받으며 몇 시간 응급실에 있다 보니 큰 아들이 왔다. 당연히 큰 며느리는 오지 않았다. 시아버지 임종 때도 결국 오지 않은 이해할 수 없는 사람이다. 남편이 이제 형한테 넘기고 가자는 시늉을 한다. 남편도 나도 폭우가 쏟아지는 상황에서 몇 시간을 놀래고 놀란 터라 힘들기도 했고 아이들만 집에 있어 걱정이 되기도 했다. 그동안 단 한 번도 부모 병간호 안 해봤으니 이젠 어머니가 제일 아끼는 큰 아들이 해야지 싶어 나도 과감하게 보호자 딱지를 넘겨주고 와버렸다.
시어머니의 큰 아들은 항상 엄마의 말을 잘 듣고 모든 잘못을 못 본 척 용돈만 주면 입 다물고 살았다고 한다. 둘째인 내 남편은 이러저러한 일들로 엄마와 마찰이 많았고, 아버지께 차마 말 못 할 많은 일들을 아버지를 대신해 얘기하고 잘못하는 거라고 싸워서 늘 구박만 받았다. 막내인 우리 시누는 착하기만 한 사람이고 심지어 그땐 어려서 상황인지가 잘 안 됐을 거다.
아버지가 배 타러 나가면 도박을 하느라 며칠씩 안 들어오기도 하고 남자문제에 술문제까지 총체적 난관이었던 모양이다. 어디까지나 남편의 진술이니 주관적이라 생각했었는데 그 사실들을 아버지가 다 알고 계시다는 점에 너무 놀랐던 적이 있다. 알면서도 자식들 앞에서는 절대 내색하지 않으셨다. 세월이 어느 정도 흘러 결혼한 지 10년이 좀 넘었을 즈음 나한테 하나하나 말씀해 주셨다. 내 남편이 엄마에게 소원한 것을 충분히 이해한다고 그러니 남편이 엄마를 미워하더라도 이해해 주라고 말이다. 그땐 이미 시어머니가 어떤 사람인지 나 스스로도 깨닫고 있었기에 굳이 남편이 엄마를 만나러 가지 않는 것을 이해하고 또 이해하고 있었다. 그래서 그가 해야 할 도리를 나라도 하자 싶어 옆에 붙어산지도 모르겠다.
모성애 제로 시어머니에 대한 수많은 에피소드가 있지만 제일 기억에 남는 일이 있다. 시누가 힘들게 시험관으로 아이를 갖고 제왕절개로 첫 아이를 낳았을 때다. 아침 일찍 기차 타고 아이를 보러 간 아버지가 생각보다 일찍 집에 돌아오셨다며 연락을 하셨다. 그러면서 바로 집으로 좀 오라고.
'이런, 무슨 사달이 났구나' 목소리에 설움이 복받치는 게 전화기 너머로 느껴질 정도였다.
내가 가자마자 우시면서 어찌 엄마라는 사람이 저렇게 모지냐고 말씀하시는데 이게 무슨 일이야 도대체..
듣자 하니, 아침기차로 가신 두 분은 점심때쯤 도착하셨고 딸 얼굴과 아기 얼굴을 보고 이른 점심을 병원식당에서 드시고 다시 병실로 향하는데 어머니가 지겹다고 집에 가자고 하셨단다. 무슨 소리냐고 여기까지 와서 어제 수술하고 간호해 줄 사람도 없는데 잠시라도 봐주고 가야지 호통을 치시고 병실로 갔는데 산모식사 중인 딸을 보면서도 집에 가자고 지겹다고 아버지를 재차 재촉한신거다.
혼자 낑낑거리며 식판을 내놓을 딸 걱정과 옆에서 짜증만 내고 있는 그녀의 엄마를 보고 억장이 무너지셨단다. 딸 걱정이라고는 1도 없는 매정한 모습에 화가 난다는 표현으로는 다 할 수 없는 마음으로 식판만 내주고 바로 내려오신 거였다.
"아이고, 아무리 그래도 어머니. 아가씨 산후조리도 제대로 못하는데 너무 하셨네요"
나도 모르게 한 마디가 나와버렸다. 나랑 상관없다는 무표정에 처음으로 소름이 돋았다.
모든 여자들은 아이를 가지고 낳고 키우면서 내가 이런 사람이었나 싶을 정도의 모성애를 경험한다. 아이를 위해 못 할 것이 없는 슈퍼맘이 되어 어떠한 상황이 와도 아이를 보호하는 엄마는 너무나 당연한 얘기다. 하지만, 때로는 과하게 표현되어 맘충이 되기도 하고 또 어떤 이는 엄마임을 부정하는 갖가지 악행들을 벌이기도 한다.
그런 일들을 간혹 뉴스에서 접하지만 대부분의 엄마들은 자식이 1순위가 되어 '내 모든 것을 내어주어도 아깝지 않다'라는 명제하에 아이에게 감동받기도 하고 실망하기도 하며 싸우고 화해하고 후회하면서 자식에 대한 더 깊은 애정을 느끼게 마련이다.
늘 더 잘해주고 싶고, 그렇지 못할 때는 끝없이 미안해하기도 하면서 아이가 크는 만큼 엄마도 10등급에서 1등급씩 높아지는 과정을 겪게 될 것이다. 앞에서 언급한 나의 시어머니는 모성애 등급은 10등급.. 그냥 낳기만 한 거다. 아이를 위해 자기 것을 내놓지 않는 지금도 자식들 생일은 기억 못 하지만 본인의 생일이 되면 하루 이틀 전 전화부터 온다.
"낼모레 내 생일이데이~~"
나는 그래서 자식을 넷 키운다. 엄마의 사랑이란 걸 못 받고 자란 남편이 불쌍해서 굳이 큰 아들 삼아 키우고 있다. 동반성장! 그도 나와 함께 부성애 등급이 하루하루 높아지고 있다.
모성애는 처음부터 완벽한 게 아니라 노력해서 키우는 것이다.
그래서 모성애도 등급이 있다고 생각한다. 10등급에서 1등급까지 있다면 나는 이제 한 7등급쯤?
우리 엄마는 2등급? 우리 엄마 얘기는 다음 기회에~~~
'어머님, 제발 쾌차하셔서 자식들 힘들게 하지 말아 주세요......' 매일 바라고 또 바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