늦은 겨울이 아직 채 빠져나가지 못한 골목길은 저절로 주머니에 손을 넣게 만든다. 입학식인데 좀 따뜻해도 되련만. 나는 단짝인 다희와 함께 집 앞에서부터 함께 학교로 향했다. 엄마가 준 핫팩을 하나씩 손에 나눠 들고 동방신기 얘기하느라 교문 통과하는 것도 모르고 지나갔다. 반이 달라서 서운하긴 했지만, 같은 학교라도 걸려서 다행이었다. 나는 내성적인 성격이지만 친한 친구들 사이에선 꽤 외향적이기도 한 편이어서 어울려 지내는 아이들이 많이 있었다. 그런데 중학교에선 새로 또 친구들을 사귀어야만 한다. 부담스러운 일이다. 중학생이 되었다는 설렘은커녕, 어떻게 친구들을 또 사귀어야 하나라는 부담감이 엄습해 왔다. 반엔 아는 친구가 하나도 없었다. 어쩜 이리도 잘게 쪼개 놓으셨을까. 원망해봤자 돌이킬 수 없고, 누가 누가 나랑 친하면 좋을까 탐색에 들어갔다. 너무 이쁘거나 잘생기면 중간에 틀어지기 쉽다. 어린 나이지만, 평범한 비주류로 살아가기 위한 처세술을 능숙하게 알고 있는 나였다. 자리가 정해지고, 친해져도 될듯한 인상을 가진 지수라는 아이와 짝이 되었다. 첫날인데도 오래전부터 알아 온 것처럼 금방 친구가 되었다. 그런데, 건너편에 앉은 남자아이가 소란스럽다. 수업 시간에도 좀처럼 가만히 있지 못 하고 선생님께 엉뚱한 질문을 하거나 딴짓하기에 바빴다. 한마디로 어디로 튈지 모르는 아이였다. 정신없는 행동과 이름 때문에 입학 첫날부터 똥물이라 불린, 박동수! 그 녀석을 이십 년 만에 다시 만났다.
내장을 뒤틀 것만 같은 고통스러움에 잠에서 깨었다. 낯익은 벽과 익숙한 침대. 다행히 집은 잘 찾아왔나 보다. 최 부장에게 인사한 것까진 생각이 나는데 집까지 어떻게 왔는지 기억이 없다. ‘택시 타고 왔겠지.’ 싶어 카드사용 알림을 찾아보니 아무것도 없다. 가방 안을 뒤졌는데, 있어야 할 건 다 있다. 최 부장님이 택시비를 주셨나 보다. 나는 주방으로 기어갔다. 뭔가 목으로 넘기지 않으면 역으로 안에 있는 것들이 다 나올 기세였다. 냉장고 문을 열고 생수병째 들고 벌컥벌컥 마셨다. 그런데 그 물이 마중물이 되어 역류하듯 올라오기 시작했다. 그렇게 화장실을 여러 번 다녀온 후에야 어제 들이부은 술은 몸에서 조금씩 빠져나갔다.
‘다시 술 마시면 내가 사람이 아니지.’나는 전화기를 집어 들고 지수에게 전화를 걸었다. 그리고 똥물이 한 시윤이라는 사실을 말하려다가 말았다. 그냥 한 시윤 매니저를 맡게 돼서 당분간 바쁠 것이다. 다음 주에 가기로 한 여행은 어찌 될지 모르겠다. 정도에서 양해를 구했다. 둘이 1박2일 차박을 하기로 한 거라 큰 무리는 없었다. 지수도 한 시윤 맡으면 힘들겠다며 걱정부터 한다. 내가 그동안 욕을 많이 했나 보다. 이제 그러면 안 된다. 직업정신으로 무장해야지.
오후가 되자 슬슬 정신이 돌아오기 시작했다. 배달앱을 열고 뭐라도 시켜보려는데 벨이 울린다. ‘뭐지?’ 배달 기사 차림의 아저씨 뒤통수만 보였다. 그는 순식간에 엘리베이터와 함께 사라져 버렸고, 문 앞에는 그가 두고 간 듯한 배달 봉지가 놓여 있었다. 잘못 배달하신 거 같은데 싶어 봉지에 붙은 종이에서 급히 전화번호를 찾고 있는데 핸드폰 알람이 울렸다.
‘속 풀고 정신 차려. 똥물.’
‘아, 그리고, 내 번호 저장해.’
연이은 카톡에 끊어진 내 기억은 어제 그 시간의 어딘가로 되돌아갔다. 나는 오랜만에 만난 중학교 동창에게 2차를 가자고 조르고 있었고, 동창은 난감한 표정으로 택시에 나를 태우고 옆에 앉았다. 그리고, 내가 집에 들어가는 걸 확인하고야 되돌아갔다. ‘고? 미쳤네, 미쳤어. 내가 술 끊으라고 했어, 안 했어. 이 정신 나간 것아. 이걸 어쩔 거야.’ 되살아난 기억은 내 얼굴을 용광로에 비유해도 이상할 게 없을 정도로 붉게 만들었다. 첫날부터 이게 무슨 쪽팔리는 일이람. 최대한 공손하게 매니저로서의 예의를 다해 답장했다.
‘신경 써 주셔서 감사합니다. 한 배우님. 어제 제가 술을 너무 많이 마셨나 봐요. 여러모로 감사합니다. 월요일에 뵙겠습니다.’ 밀린 일을 후딱 해치우는 심정으로 답장을 보내고 덩그러니 놓인 배달 봉지를 보았다. 갈비탕 좋아하는 건 또 어떻게 알고. 배달로 온 음식이 무슨 죄인가 싶어 남김없이 탈탈 털어 넣고 나니 살 것 같았다.
다음 날 회사에 가서 놓고 온 차를 집에 가져다 놓고, 업무용 차량을 인계받아 다시 집으로 돌아왔다. 월요일부터 시작이라고는 하지만, 매사에 철두철미한 편이라 이미 김 주임에게 스케줄표랑 늘 가는 헤어 샾의 위치도 파악해 두었다. 그리고, 메이크업 담당자, 의상담당자들과도 미리 전화로 인사를 해두었다. 그래야, 일에 바로 들어가도 착오가 없을 것이다. 그리고, 그 녀석 집 주소까지 건네받았다. 낯선 일에 도전하는 거였다. 엔터 회사에서 10년이나 일했다고는 하지만, 책상에 앉아서 기획안을 만들거나, 홍보물 제작만 해봤지 실제로 연예인들의 생활은 본 적이 없다. 나는 일요일 저녁, 최대한 늦지 않고, 이르지 않은 이상적인 시간으로 골라 문자를 남겼다. ‘내일 오후 1시 화보 촬영이 있으니 오전 10시에 주차장에서 뵙겠습니다.’ 읽씹. ‘재수 없는 녀석.’ 하긴, 첫날부터 그런 추태를 보였으니 할 말이 없다.
큰 차는 처음 몰아봐서 걱정했는데 교차로 두 번 지나니 금방 익숙해졌다. 자동문 버튼도 미리 체크하고, 한 배우가 즐겨 마신다는 음료도 픽업해서 대기 중이다. 오면 뒷좌석 자동문 버튼을 누르고 웰컴 드링크와 함께 배우님을 맞이하면 될 일만 남았다. 시간이 좀 남아서 가방에서 립밤을 꺼내 바르고 있는데 조수석 문이 벌컥 열렸다. 깜짝 놀라 쳐다보니 똥물, 아니 한 배우다.
“아, 안녕하세요. 뒤로 타셔야죠. 뒷문 열어 드릴게요.”
“나 앞에 타. 그 얘기는 전달 못 받았나 보네.”
‘그래, 그런 얘기는 못 들었다. 이 자식아.’
“아, 그러시구나. 아, 이거. 좋아하신다고.”
“고마워, 갈비탕 답례라고 생각할게.”
‘아니, 법카로 산 건데’ “아, 네.”
일단 지난 일은 덮고 지금부터 생각하자. 나는 정신을 바짝 차리기로 했다. 한 배우의 집에서 샾까지는 30분 정도 걸린다. 30분이 이렇게 길었나? 운전에 집중하려고 해도 옆에 앉아 있으니 괜한 신경이 쓰였다.
“저기 다음부터는 뒤에 앉으시면 안 될까요? 거기가 더 편하실 거 같은데.”
“왜? 내가 옆에 있으니까 떨려?”
‘이 자식이 뭐래 지금. 죽고 싶어 환장했나?’
“아니, 그럴 리가 있나요. 큰 차 운전이 서툴러서 혹시나 해서요.”
“그럼 더 옆에 앉아야겠네. 혹시나 사고라도 나면 안 되니까.”
‘그래, 그러든지.’
말을 안 하는 게 낫겠다 싶어 운전에만 집중했다. 그때 갑자기 동수가 사라졌던 때가 생각났다. 동수네가 이민 가고 여러 말들이 돌았다. 아빠가 하던 사업이 망해서 야반도주한 거다. 동수의 ADHD 치료 때문에 그렇다더라. 아빠가 바람을 피웠대 등등. 온갖 소문이 동네에 난무했다. 그렇게 이십 년이란 세월이 지나 이제 그들에 관해 궁금해하는 사람은 더 이상 없다. 나 역시도 잊고 살았는데, 갑자기 내가 그의 매니저를 하고 있다. 실제 사람들의 삶도 티브이 속에서 일어나는 일들처럼 알 수 없는 사건들의 연속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