끊어진 기억

by 열정아줌마

정확히 예상한 시간에 샾에 도착했다. 입구에서부터 한 배우는 인기가 많았다. 인성 개차반이라더니 꼭 그렇지만은 않은가 보다. 직원들과 스스럼없이 지내는 모습을 보니 내가 색안경을 꼈나 싶기도 했다. 하긴, 나와 상관없는 사람이었으니 기사에 난 대로 바람둥이라고 생각했고, 인성 논란 역시 기정사실처럼 받아들였다. 그래서 내 머리엔 스캔들 메이커에 나쁜 놈이라는 인식이 강하게 남아 있었다. 그를 따라 들어간 샾에서 새로 찍은 명함을 내밀며 나름의 신고식을 했다. 다들 얼마나 버티나 보자 그런 눈빛인 듯했다. 하긴, 6개월을 넘긴 애들이 없었다. ‘두고 봐라. 내가 1년 딱 채우고, 인센티브 두둑이 받아 대출 일부 상환해 버릴라니까.’ 이를 갈며, 얼굴에는 자본주의 미소를 짓고 여기저기 돌아다니며 인사를 했다. 그러는 동안, 화보 촬영에 필요한 기본 세팅이 완료되었다. 의상팀과 메이크업팀은 촬영장에서 바로 만나기로 했기에 다시 둘만 차에 올랐다. 제법 연예인 티가 난다. 그나저나, 얘가 이런 얼굴이었나? 졸업앨범에도 사진이 없어서 옛날 얼굴이 가물가물했다. 지금처럼 키가 크지 않았다. 어깨도 좁았다. 또래 아이들보다 왜소했고, 그냥 산만한 아이였다. 하지만, 주위 시선들은 동수에게 매정했다. 선생님도 친구들도 동수를 싫어했다. 하지만, 동방신기라는 교집합으로 동수는 나와 친해졌고, 몇몇 친구들도 동수와 친하게 지냈다. 처음에는 아무도 동수에게 말을 걸지 않았다. 하지만, 어느 순간부터 우리 반의 똥물로 자리 잡았고, 그중에서도 나와 지수 그리고 동수는 제법 친하게 지냈다.

‘그래, 그때 지수랑 셋이 동방신기 춤추고 그랬는데.’ 혼자 옛날 생각을 하다 보니 촬영장 인근에 다다랐다. 그는 내가 알던 동수가 아니었다. 촬영장이 가까워지자, 스토리보드를 다시 점검하고 매무새를 새로 고쳤다. 그리고, 프로의 눈빛으로 차에서 내렸다. 나는 주차를 하고 뒤쫓아 들어갔다. 커다란 창고 같은 곳에 큰 카메라와 작은 카메라들이 즐비하게 준비되어 있었다. 남성용 잡지 촬영이었다. 무려 스무 벌 가까운 옷을 갈아입고 헤어스타일과 화장을 바꾸면서 다른 분위기를 연출해야 했다. 나라면 거품 물고 쓰러질만한 일을 한 배우는 완벽히 해내고 있었다. 사진을 찍는 사람들은 감탄사를 내뱉으며 찍으면 A컷이라고 칭찬 일색이다. 그 녀석은 장장 10시간에 가까운 시간 동안 물 외에는 아무것도 먹지 않고 촬영에만 전념했다. 나도 중간중간 사진을 찍으며 매니저로서의 본분을 잊지 않았지만, 말로만 듣던 프리미엄 케이터링에 현혹되어 촬영이 잠시 쉬는 틈을 타 고급스런 음식의 향연에 빠져들고 있었다.

“너는 식성 하나는 끝내 준다. 여전하네.”

‘아, 젠장. 쉬라고 했더니 여긴 왜 온 거야.’

“한 배우님도 좀 드세요. 그러다 쓰러지겠어요.”

“매니저님 많이 드세요. 하하.”

‘이런 재수 없는 녀석 같으니. 잠시 지난날을 추억했던 내가 바보지. 그래, 내 기억이 틀린 거야, 인성이 나쁜 게 분명해.’

촬영은 무사히 끝났다. 잡지사에서도 한 배우의 집중력을 칭찬했고 덕분에 좋은 사진 많이 건졌다며 감사해했다. 그러든가 말든가, 나는 이제 저 녀석을 집에다 데려다 놓고 내 집으로 가면 된다. 하루가 이렇게 길다니, 최 부장에게 수당을 올려달라고 해야겠다. 너무 중노동이었다. 벌써 11시가 넘었다. 내일은 그나마 스케줄이 없으니 좀 쉬어도 되려나. 힘이 주욱 빠졌다.

“힘들겠어요. 배 안 고파요?”

인간적으로 고된 일정이었다. 모르는 사람도 그런 말을 할 법 하다. 나는 심지어 매니저 아닌가. 그 정도의 말은 건네야 할 것 같았다.

“배고파. 엄청.”

“가는 길에 음식 포장할게요. 집에 가서 편하게 드세요. 뭐 좋아하세요?”

“아니, 너랑 밥 먹을래. 밖에서. 집에 가면 그냥 잠들 거 같아. 그럼 하루 종일 굶는 건데 나 잘못되면 어떻게 해?”

‘하루 굶는다고 안 죽어, 이 녀석아. 살 뺀다고 나 많이 해봤거든?’

“시간도 늦었고, 괜히 안 좋은 소문이라도 나면.”

“매니저랑 밥 먹는데 무슨 소문? 그리고, 너는 소문 안 나. 튀는 얼굴이 아니야. 걱정 하지 마.”

거절할 이유를 찾아야 하는데 그럴 만한 게 없었다. 결국, 그 녀석 아파트에 주차하고 밖으로 나왔다. 이미 시간은 열두 시를 넘었고, 밥을 먹을 만한 곳은 열려 있지 않았다. 동수는 자기 단골집이 있다며 나를 안내했다. 2층에 있는 조그마한 위스키 바였다.

“여기서 무슨 밥을 먹어요. 차라리 편의점이 낫지 않겠어요?”

“이 동네 처음이잖아? 오늘 여기 가면 이 동네에서 살고 싶어질지도 몰라.”

동수는 성큼성큼 계단을 올랐다. 시간이 늦은 만큼 바에는 아무도 없었다. 외국인으로 보이는 남자가 바를 지키고 있었고, 동수는 익숙하다는 듯 그에게 다가가 허그하며 인사를 했다. 영어도 아니고, 저게 무슨 말이지? 께탈? 급히 핸드폰을 꺼내 들은 대로 쳐보았다. ‘스페인어구나. 스페인으로 이민을 간 건가?’

동수는 한참 그 사람과 이야기를 나누고는 어깨를 으쓱거리며 보란 듯이 자리로 돌아왔다. 자세히 보니 예전 모습이 있는 것도 같다. 음식이고 뭐고 빨리 집에 가고 싶었다. 처음 겪는 일들에 하루 종일 신경 썼더니 누우면 바로 잠들 것처럼 피곤이 몰려왔다. 내가 담당하는 연예인의 배가 차면 집으로 보내고 나는 차를 몰고 다시 우리집으로 가면 오늘의 일과는 끝난다. 예상대로 된다면야 세상만사 꼬일 일이 없겠지만, 내 손엔 이미 맥주 한 병이 들려 있었다. 차는 두고 가면 되지 않냐는 말에 쉽게 넘어가고 말았다. 술이 문제다 항상.

동수가 으쓱해 할 만했다. 처음 보는 먹음직스러운 고기 요리가 한가득 차려져 나왔다. 항상 있는 메뉴는 아니란다. 가끔 오는 한 배우에게만 제공되는 특별메뉴. 집밥 차려 내오는 느낌이랄까? 뭐 여하튼 잘 먹는 동수를 보니 기분이 좋아졌다. 하루 종일 굶었는데 얼마나 허기가 질까? 조용히 맥주 맛을 음미하고 있는데, 한참 먹다가 말고 그가 툭 말을 꺼냈다.

“넌 안 궁금해?”

내가 무슨 말이냐는 뜻으로 눈꼬리를 치켜들자, 둘이 있을 때는 말 편하게 하자고 부탁 조로 얘기한다. 뭐 그렇게까지 나온다면 거절할 명분이 없다.

“뭐가?”

“내가 갑자기 이민 가 버린 거.”

“네 뜻은 아니었을 거 아냐. 어른들이 결정하신 거고 너는 따랐겠지.”

“간단하네. 맞아. 딱 그랬어.”

“그런데 너희 가족 떠나고 소문이 무성하긴 했어. 사람들 알잖아. 수군대는 거.”

“어. 알아. 엄마가 친구분이랑 얘기하는 걸 들었거든.”

“무슨 이유가 있었든 이미 지난 일이야. 내가 궁금해해야 할 이유라도 있는 거야?”

“아니, 혹시나 나를 기다렸나 해서.”

“그럴 리가 없잖아. 말없이 간 건 너고, 우리가 연인 사이도 아니고. 친구는 또 사귀면 될 일이야.”

거짓말이었다. 나는 동수가 가고, 한동안 아팠다. 엄마의 말로는 보름 정도 의식이 없었다고 했다. 그리고, 정신이 들고 한참 후에야 동수가 이민을 떠났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꽤 중요한 한 부분을 잃은 것처럼 마음 한구석이 아파서 오랜 시간 우울하게 보냈다. 그땐 왜 아팠는지 몰랐다. 지수가 엄마랑 하는 얘기를 얼핏 들었다. 동수가 가버려서 그런 것 같다고. 그래서 동수가 가버려서 아팠나보다 그러고 말았다. 왜 혼수상태였는지. 그렇게까지 마음이 아파야 했는지. 누구도 말해주지 않았다. 건강을 되찾고, 다시 학교생활을 시작했지만, 아무도 그 녀석에 관한 이야기를 꺼내지 않았다. 그때 이후로 나는 나라는 사람의 정체성을 잃었는지도 모른다. 친구를 사귀는 것도 조심스러워졌고 사람들에게 점점 내 속을 열지 않게 되었다. 언제 떠날지 모르는 사람들. 상처받고 싶지 않았고, 그래서 더 이상 상처 받지 않았다.

“네 말이 맞아. 넌 언제나 현명했어.”

동수는 한동안 말없이 맥주만 마셨다. 이제 두 번째 마주하는 얼굴인데 너무나 다양한 표정이 뒤섞여 진짜 동수가 누군지 알 수가 없었다. 한 시윤이기도 하고 박동수이기도 했다.

“이제 가자. 너무 늦었다. 너 쉬어야지. 모레 아침 일찍부터 드라마 촬영 있어.”

“그래.”

짧은 대화를 끝으로 나는 집으로 가는 택시에 올랐다. 저번처럼 실수하기 싫어서 자제해서 마셨다. 양껏 마시지 못해 화가 났는지 집에 오자마자 냉장고에 있던 맥주를 벌컥벌컥 마셨다. 그리고, 빈 캔을 구부리며 동수의 표정을 떠올렸다.

‘무슨 일이 있었던 걸까? 이십 년 동안.’


그날 밤, 나는 꿈을 꾸었다. 지수와 나는 학교 스탠드에 앉아 있다. 저 멀리 농구 골대 아래에 동수가 반 아이들에게 둘러싸여 있다. 그 아이들은 동수를 마구잡이로 패기 시작했고, 동수는 아무 말도 못 하고 맞고 있었다. 나는 그냥 조용히 바라만 본다. 어떠한 행동도 취하지 않고.

눈을 떴다. 오후 두 시였다. 옷도 갈아입지 않고 그대로 잠이 들었었나 보다. 바닥엔 다 먹은 맥주 캔이 늘어져 있고, 화장도 지우지 않아 얼굴은 엉망진창이었다. 샤워하고 나와서 맥주 한 캔을 땄다. 내일 일찍 나가야 하니까, 오늘은 여기까지만 마시자. 한 모금씩 아껴 먹으며 꿈에 대해 생각했다. 그때 무슨 일이 있었던 걸까? 2년을 같이 보냈는데 지수와 동수 나, 셋이 춤추며 논 것 외엔 아무것도 생각나지 않았다. ‘이 찜찜함은 뭐지?’ 나는 핸드폰 알람을 새벽 4시에 맞추고 다시 잠이 들었다. 꿈은 다시 이어졌다. 동수는 여전히 맞고 있었고, 나는 스탠드에서 물끄러미 그 광경을 지켜보고 있을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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